‹ 목록으로 대현자의 마지막 제자

2화

빛이 거인의 팔을 관통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비린내와 탄내가 섞인 냄새였다. 거인이 비명을 질렀다. 땅이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돌덩이 같은 몸이 뒤로 밀려났다. 나는 소녀를 끌어당겼다. 한 팔로 안았다. 가벼웠다. 너무 가벼웠다. 이 정도 몸무게로 어떻게 던전에 소환됐을까.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쳤다. 거인이 다시 일어섰다. 눈이 붉게 타올랐다. 관통당한 팔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소녀를 등 뒤로 숨겼다. 손끝에 마력을 다시 모았다. 오랜만에 쓰는 근육이었다. 삐걱거렸다. 관절 하나하나가 저항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움직였다. 거인의 발이 땅을 짓눌렀다. 쿵. 한 걸음. 쿵. 또 한 걸음. 쿵. 세 번째 걸음에서 거인의 속도가 빨라졌다. "눈 감아." 소녀에게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숨소리만 들렸다. 거칠고 얕은 숨소리였다. 나는 마력을 쏘았다. 두 번째 빛이 거인의 몸통을 갈랐다. 갈라진 틈에서 붉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거인이 무너졌다. 땅이 울렸다. 발밑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먼지가 가라앉았다.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했다. 방금까지 있었던 비명과 진동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만에 몸을 썼다. 손이 떨렸다. 숨을 쉴 때마다 목 안쪽이 따가웠다.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뜨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 생각조차 늦게 왔다. "괜찮아?"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익숙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왜인지 마음이 걸렸다. 소녀가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무너졌다. 바닥에 팔을 짚었다가 다시 놓쳤다. "잠깐 누워 있어." 나는 상처를 살폈다. 부러진 팔. 갈비뼈도 몇 개. 그래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거인의 손톱 한 번이면 몸이 반으로 갈라지기도 했다. 200년 전에 그런 모습을 몇 번이나 봤었다. 치료 마법을 걸었다. 손끝에서 온기가 흘러나왔다. 소녀의 숨이 조금씩 편해졌다. 얕던 숨이 깊어졌다. 경련하던 손끝이 잠잠해졌다. "당신은... 누구세요."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래도 눈은 똑바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 "그런 마법을 쓰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던 사람일 리가..." 말이 맞았다. 지금 이 시대에 시술 없이 즉발로 마법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있었다면 이미 유명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름을 밝힐 이유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무릎을 펴는 순간 다리가 살짝 저렸다. 그때 소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손가락에 힘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놓지 않았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세요." 나는 멈췄다. "뭐?" "방금 그 마법. 그런 힘을 가진 사람 처음 봐요. 저를 가르쳐 주세요." 소녀는 부러진 팔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꿇었다. 이가 딱딱 부딪혔다. 통증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고개를 숙였다. "제발요." 나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200년 전에도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있었다.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은 늘 고개를 들고 요구했다. "같이 가자." 그 말이었다. 무릎 꿇고 애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때 그 사람은 애원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손을 내밀면 됐다. 나는 눈앞의 소녀를 다시 보았다. 같지 않았다. 닮지도 않았다. 머리색도 다르고 눈동자 색도 달랐다. 그런데 뭔가 걸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걸림이었다. "이름이 뭐지." "황서윤이에요." 황. 그 성이 목에 걸렸다. 숨을 한 번 삼켰다. "황가?" "네. 분가 쪽이지만요." 분가. 본가에서 밀려난 쪽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런 곳까지 소환되어 죽을 뻔한 것이었다. 본가의 아이들은 이런 위험한 던전에 소환될 일이 없었다. 분가의 아이들만 이런 곳에서 죽거나 살았다. 나는 서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매가 낯익었다. 고집스러운 턱선도. 200년 전, 그 사람도 이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모하다고 말려도 듣지 않는 눈. 지지 않겠다는 눈. 우연이겠지. 그런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했다. "조상이 누구지." "할머니의 할머니 쪽으로... 옛날에 마왕을 토벌했다는 그분이라고 들었어요. 황단비." 황단비.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뭔가 안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숨이 멈췄다. 200년 동안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남이 그 이름을 말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처음이었다. 200년 동안 아무도 그 이름을 내 앞에서 말하지 않았다. 나는 표정을 지웠다. 얼굴에서 모든 것을 빼냈다. "제자는 안 받아." "왜요." "이유는 없어. 그냥 안 받아." 서윤의 눈이 흔들렸다. 그래도 손을 놓지 않았다. 부러진 팔로 내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저는 본가로 돌아가면 끝이에요. 이번에 또 낙오하면... 폐인 처리 명단에 올라가요." 폐인 처리. 무예도, 마술도 중간 수준이라 낙오자 취급받는 아이들이 그렇게 되는 걸 알고 있었다. 마력을 회수당하고 평민으로 강등되는 처분이었다. 가문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는 처지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남의 집안 일이었다. "그건 내 문제가 아니야." "그럼 왜 구해주셨어요." 말이 막혔다. 답이 없었다. 왜 그랬는지, 나조차 몰랐다. 거인이 소녀를 짓밟으려는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생각보다 몸이 빨랐다. 그게 다였다. 서윤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부러진 팔을 감싸며 다시 무릎을 꿇었다. 통증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도 무릎을 펴지 않았다. "한 달만요. 딱 한 달만 시간을 주세요. 그 안에 아무것도 못 배우면 다시는 안 나타날게요."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황단비의 후손. 하지만 황단비가 아니었다. 이름이 같아서, 눈매가 닮아서, 그것만으로 저 아이가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서윤은 그 침묵 동안 눈을 떼지 않았다. 무릎이 아플 텐데도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시술 생략." 나는 그 단어를 뱉었다. "마법 영창 없이 즉발로 술을 완성하는 기술. 그걸 한 달 안에 완성하면." 서윤의 눈이 커졌다. "그럼..." "인정해 주지. 제자로." 말을 뱉고 나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시술 생략은 웬만한 마법사들이 평생을 걸어도 못 넘는 벽이었다. 한 달 안에 되는 게 아니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조건이었다. 그러니 서윤이 실패할 거고, 나는 약속을 지키는 척 안 지켜도 되는 셈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다. 서윤이 눈물을 글썽였다. 부러진 팔을 감싼 채로도 표정이 환해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등을 돌렸다. 더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내일부터 시작이다. 늦으면 없는 걸로 해." "어디로 가야 하나요?" "경마장 뒷골목." 말해놓고 스스로도 웃겼다. 대현자의 거처가 경마장 뒷골목이라니. 200년 전의 나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주소였다. 서윤이 뒤에서 뭔가 더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발걸음을 서둘렀다. 무너진 던전을 빠져나오며, 나는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 왜 그 이름에 이렇게 반응했을까. 200년이나 지났는데. 그 정도 시간이면 무뎌질 만도 한데. 던전 밖으로 나오자 익숙한 도시의 소음이 들렸다. 자동차 경적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그 안에 섞여 걸으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같은 자리를 돌았다. 황단비. 그 이름을 마지막으로 들었던 날이 떠올랐다. 비가 내리던 밤이었다. 그 사람의 손이 내 손을 놓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경마장 뒷골목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내일 그 아이가 정말로 찾아올까. 찾아온다면, 나는 그 얼굴을 어떤 표정으로 마주해야 할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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