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현자의 마지막 제자

1화

경마장 전광판이 붉게 깜박였다. 7번, 한지유. 8번, 붉은서리. 9번, 밤의질주. 배당률이 떴다. 9번은 47배였다. 아무도 걸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이 좋았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것.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주머니 속 지폐를 세었다. 전부 세 번 세었다. 세 번 다 같은 숫자였다. 3만 2천 원. 그게 내가 200년을 살아온 결과였다. 나는 창구로 걸어갔다. 직원이 표를 내밀며 말했다. "9번 단승, 3만 2천 원 맞으시죠?" "네." "행운을 빌게요." 행운이라는 말이 낯설었다. 200년 동안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나 생각했다. 없었던 것 같았다. 오후 8시 17분. 출발선에 말들이 섰다. 나는 표를 손에 쥐었다. 종이가 벌써 땀에 젖어 있었다. 출발 신호가 울렸다. 말들이 뛰쳐나갔다. 심장이 뛰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8번이 앞섰다. 7번이 따라붙었다. 9번은 꼴찌였다. 관중석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8번! 8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9번의 등을 보고 있었다. 꼴찌로 달리는 등을. 200년 전, 나도 저런 등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믿지 않을 때. 그때 내 등도 저렇게 작아 보였을 것이다.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9번은 꼴찌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나는 표를 손에 쥔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손이 떨렸다. 200년을 살았다. 마왕을 베었다. 대륙을 구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경마 표 한 장에 손을 떨고 있었다. 그 사실이 웃겼다. 웃어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졌다. 동전 몇 개가 만져졌다. 지폐는 없었다. 집으로 가는 마차비도 남지 않았다. 걷기로 했다. 경마장을 나서면서 표를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위로 다른 사람들의 발이 지나갔다. 누군가 그걸 밟고 지나가는 걸 보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느껴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았다. 밤거리는 조용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지났다.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어둠이 짧게 나를 삼켰다가 다시 뱉어냈다. 그 리듬이 200년 같았다. 밝음과 어둠이 반복되는데 나는 늘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창문 안쪽에서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군가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나는 그 안에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엘프의 외형은 늙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시간은 흐른다. 200년째, 나는 여전히 열여덟 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래는 남자였다. 고등학생이었다. 이종전신 스킬을 잘못 골랐다. 엘프였다. 그 뒤로 나는 영원히 여자의 몸으로 살았다. 그날의 스킬 목록이 아직도 기억났다. '인간 전사', '오크 광전사', '엘프 궁수'. 셋 중 하나를 고르는 데 3초가 주어졌다. 나는 세 번째를 골랐다. 설명을 다 읽지 못했다. 그냥 이름이 예뻐서 골랐다. 그 선택으로 나는 여자가 되었다. 그 선택으로 나는 늙지 않는 몸을 얻었다. 그 선택으로 나는 200년을 살게 되었다. 익숙해졌느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습관처럼 몸이 이 모습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아침에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선 얼굴이 나를 본다. 그 낯섦도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골목을 돌았을 때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던전이 무너졌대." "입구 쪽이 완전히 막혔다더라." "안에 있던 애들은 어떻게 됐대?" 나는 걸음을 멈췄다. 던전. 그 단어에 손끝이 다시 차가워졌다. 이번엔 도박 때문이 아니었다. 200년 전, 나는 던전 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 옆에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 내가 넘어지면 대신 칼을 받아주던 사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거기 지하 3층까지 뭔가 있다고 했잖아." "소환된 애들이 몇 있었다는데." "본가 후보였다며." 본가. 소환. 후보. 그 세 단어가 이어지자 뭔가 걸렸다. 요즘 세상은 오래된 가문들이 아이들을 소환해 훈련시킨다. 용사의 자질이 있다는 판정을 받으면, 어릴 때부터 던전에 밀어넣는다. 죽어도 그건 그 집안 사정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옆에 있던 노인이 혀를 찼다. "쯔쯔, 요즘 애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팔려가는 거지." "소환진에 올라가는 순간 그 집 소유가 되는 거니까."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런데 다리가 움직였다. 나는 통제소 앞으로 걸어갔다. 경비병이 막았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입니다." "몇 명이 갇혔지?"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애는 있나?" 경비병의 눈이 흔들렸다. "구조대가 내려갔지만... 최하층 쪽은 신호가 끊겼습니다." "언제부터?" "세 시간 전부터입니다." 세 시간. 던전 최하층에서 세 시간은 영원과 같았다. 나는 그 시간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최하층. 나는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200년 전에도 늘 이런 식이었다. 가장 깊은 곳, 가장 위험한 곳에 사람들이 갇혔다. 그리고 나는 늘 그곳으로 갔다. 그때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른다. 왜 지금도 몸이 그쪽으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경비병을 밀치고 지나갔다. "이봐요! 위험합니다!"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시했다. 다른 구조대원 하나가 달려와 내 팔을 잡았다.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어요!" 나는 그 손을 뿌리쳤다.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순간 뭔가 오래된 감각이 되살아났다. 전투 직전의 감각.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던전 입구는 반쯤 무너져 있었다. 돌더미 사이로 좁은 틈이 보였다. 나는 그 틈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어깨가 긁혔다. 피가 났다. 느껴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어둠이 삼켰다. 마법으로 빛을 만들었다. 손끝에서 희미한 불빛이 피어났다. 그 빛이 흔들렸다. 200년 만에 처음으로 쓰는 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절박하게 쓰는 건 오랜만이었다. 계단이 무너져 있었다. 나는 벽을 짚고 내려갔다. 돌가루가 손바닥에 박혔다. 아팠다. 아픈데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1층, 시체 몇이 보였다. 구조대원이었다. 갑옷이 찢어져 있었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하면 다리가 멈출 것 같았다. 2층, 벽이 갈라져 있었다. 뭔가 거대한 것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발톱 자국이 벽을 파고 있었다. 자국의 깊이로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작지 않았다. 3층, 공기가 무거웠다. 마력의 밀도가 짙었다. 숨을 쉴 때마다 목 안쪽이 따가웠다. 오래된 마력이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누군가의 마력이 마지막으로 폭발한 흔적이었다. 나는 걸음을 서둘렀다. 계단 하나를 더 내려가자 온도가 달라졌다. 차가웠다.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숨소리가 들렸다. 누군가의 숨소리. 헐떡이는, 다급한 숨소리였다. 나는 그 방향으로 뛰었다. 불빛이 흔들리며 벽을 스쳤다. 벽에는 낡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 모를 그림들. 나는 불빛을 앞으로 던졌다. 거인이 있었다. 키가 5미터는 되어 보였다. 돌덩이 같은 팔이 한 사람을 짓누르고 있었다. 거인의 피부는 화강암처럼 갈라져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그 균열 사이로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살아 있는 돌이었다. 짓눌린 사람은 소녀였다. 갑옷이 찢어져 있었다. 한쪽 팔이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살, 살려..." 목소리가 끊겼다. 거인의 팔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었다. 소녀의 몸이 그 아래서 짜부라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거리를 가늠했다. 20미터. 빛이 닿기엔 멀었다. 발이 닿기엔 너무 멀었다. 거인의 팔이 다시 조금 더 내려앉았다. 소녀의 갑옷에서 삐걱,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손을 뻗었다. 200년 만이었다. 제대로 마력을 끌어올린 것이. 손끝에서 빛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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