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신님, 저 좋은 학생인가요?

5화

다짐이 하루도 못 갔다. 정확히 말하면 반나절도 못 갔다. 어제 밤에 이불 속에서 그렇게 다짐했는데.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말자, 조용히 살자, 신이 지켜보든 안 보든 얌전하게 지내자. 그렇게 결심하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그 다짐은 이미 물 건너간 뒤였다. 알람이 울렸는데 못 들었다. 정확히는 알람이 울리는 그 순간에도 꿈속에서 뭔가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뭐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났다. 그냥 눈을 떴을 때 시계를 보고 그대로 심장이 내려앉았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미쳤다." 시간을 보자마자 몸이 반응했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튀어 올랐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동시에 가방을 뒤졌다. 아침밥은 당연히 포기했다. 식탁 위에 엄마가 차려놓고 나간 반찬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그걸 먹을 시간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가방을 뒤졌다. 열쇠가 없었다. 집 열쇠. 나 혼자 다닐 때 쓰는 그 열쇠. 엄마 아빠는 이미 출근하셨고, 서윤 누나도 일찍 나갔고, 하은이는 아직 방에서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뭐야, 어디 갔어." 가방 안, 바지 주머니, 신발장 위, 다 뒤져도 없었다. 코트 주머니도 뒤졌다. 어제 입었던 바지 주머니까지 다시 확인했다. 없었다. 진짜 없었다. 이상하게 이럴 때만 물건이 사라진다. 평소엔 잘만 있던 놈이 하필 지각 십분 전에 증발해버린다. 이게 무슨 우주의 법칙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순간의 나에겐 그게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이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학교 지각 시간까지 십분 남았다. 정확히는 9분 남았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서 오분, 버스 배차간격 생각하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순간 패닉이 왔다. 열쇠가 없으면 오늘 집에 들어올 때 문제가 생긴다. 하은이가 집에 있으면 상관없지만, 걘 동아리 때문에 늦게 올 수도 있고. 그럼 나는 학교 끝나고 집 앞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머릿속으로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빠르게 그려졌다. 편의점 앞에서 시간 때우다가, 결국 서윤 누나한테 전화해서 상황 설명하고, 왜 그랬냐는 잔소리 듣고.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스쳤다. '열쇠가 여기 있으면.' 정말 별 생각 없이, 그냥 짜증과 다급함 속에서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딱히 힘을 쓰겠다는 의도도 없었다. 그냥 반사적으로 든 바람이었다. 뜨윽-! 손에 뭔가 잡혔다. 열쇠였다. 원래 있던 그 열쇠, 똑같은 모양, 똑같은 열쇠고리. 심지어 그 위에 붙어있던 조그만 곰돌이 인형 장식까지 그대로였다. 나는 순간 얼음이 됐다. 방금 뭘 한 거지. 생각만 했는데 열쇠가 그냥 손에 생겨났다. 이건 어제 티셔츠 색을 바꾸거나 돈을 늘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뭔가 시도해보자는 마음이 있었다. 실험이라고 부를 만한 여지가 있었다. 이건 아니었다. 이건 '필요'에 의한 사용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아무 검토도 없이, 그냥 위기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사용. ..이게 첫 실전인가. 첫 실전이 지각을 면하기 위한 열쇠 소환이라니. 뭔가 좀 더 거창한 상상을 했던 것 같은데, 현실은 이렇게 소박하고 급박하게 찾아왔다. 생각할 시간도 없이 나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뛰쳐나갔다. 근데 현관을 나서다가, 나는 뒤늦게 얼어붙었다. 하은이가 방문을 열고 나와서 나를 보고 있었다. 방금 그 짧은 순간, 손에서 열쇠가 나타나던 그 장면을. 정말 하필 그 타이밍에. "오빠, 방금 뭐 한 거야?" 하은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목 뒤로 서늘한 기운이 확 퍼졌다. "..뭐, 뭘."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근데 목소리가 미묘하게 갈라졌다. 티가 났을 거다, 확실히. "방금. 오빠 손에서 뭐가 갑자기 나타난 것 같았는데." 하은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시선이 꼭 뭔가를 확신한 사람의 눈빛이었다. ..봤구나. 봤다. 확실히 봤다. 저 표정, 저 눈빛. 착각으로 넘길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아니야, 그냥 열쇠 있었는데 못 찾은 거야." 나는 얼른 둘러댔다. 목소리에 최대한 힘을 빼고, 별거 아니라는 듯이. 하은이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계속 쳐다봤다. "이상하다. 진짜 아무것도 없다가 갑자기 손에 나타났었는데." "착각이야. 나 늦어서 간다." 나는 신발을 신은 채 뛰쳐나갔다. 뒤에서 하은이가 뭐라고 더 말한 것 같은데, 그 말을 다 듣지도 못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버스 정류장까지 뛰어가면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뛰는 이유가 지각 때문인지, 방금 그 일 때문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하은이가 봤다. 확실히 봤다. 여동생이지만, 그래도 목격자가 생긴 거다. ..첫 실전에서 바로 걸리다니. 야구로 치면 데뷔전에서 첫 공을 던지자마자 만루 홈런을 맞은 셈이었다. 아니, 이건 그보다 더 심각한 거였다. 홈런은 그래도 경기가 계속되지만, 이건 그날로 은퇴각이었다. 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계속 그 순간을 떠올렸다. 하은이의 눈, 그 놀란 표정, 그리고 '갑자기 나타났었는데'라는 그 말. 그 말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만약 하은이가 엄마 아빠한테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엄마가 나를 붙잡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장면, 아빠가 병원에 가보자고 하는 장면, 심지어 무슨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집에 찾아오는 상상까지 뻗어나갔다. 물론 마지막은 좀 과했다는 걸 나도 알았다. 아니, 걔가 그런 얘기를 할 이유는 없다. 워낙 요즘 반항기라 집안 대화 자체를 잘 안 하니까. 밥 먹을 때도 휴대폰만 보고, 엄마가 뭘 물어봐도 단답으로만 대답하는 애였다. 근데 그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혹시 걔가 이걸 무기로 쓰려고 하면 어떡하지. '오빠 이상한 거 봤는데'라면서 은근슬쩍 흘리고 다니거나, 아니면 나한테 뭔가 요구하면서 협박용으로 쓰거나. 하은이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손잡이를 꽉 붙잡으며, 나는 다시 그 뒤통수의 서늘함을 느꼈다. 어제 다짐했던 것.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말자는 다짐. 하루도 못 갔다. 필요에 의해서, 위기 상황에서, 나는 결국 힘을 썼다. 그리고 걸렸다. 그것도 하필 가족한테. 가장 걸리면 안 되는 상대한테. 만약 정말로 신이 지켜보고 있다면, 지금 이 상황도 다 보고 있었을 거다. 무의식적인 사용, 급하게 저지른 실수, 그리고 그 실수를 목격당한 것까지. 이걸 다 채점하고 있다면 오늘 점수는 정말 바닥일 것 같았다. 나는 오늘 시험에서 몇 점을 받았을까.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랑 똑같은 얼굴인데, 뭔가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 아마 이게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얼굴에 묻으면 이런 느낌인가보다 싶었다. 학교에 도착해서도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계속 하은이의 그 표정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1교시 수학 시간에는 선생님이 칠판에 문제를 풀라고 나를 불렀는데, 나는 완전히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가 이름 불리는 것도 못 들었다. 옆자리 친구가 팔을 툭 쳐줘서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야, 너 뭐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친구가 물었다. "아니, 그냥 잠을 못 자서." 나는 얼버무렸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잠은 잘 잤다. 다만 아침에 벌어진 그 일이 머릿속에서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점심시간에도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급식판을 앞에 두고 계속 젓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까, 친구가 왜 안 먹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냥 입맛이 없다고만 대답했다. 집에 돌아가면 하은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아무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로,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오후 수업 시간에는 아예 딴생각으로 넘어가서, 만약 하은이가 정말로 부모님께 얘기하면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몇 가지 시나리오를 짜보기도 했다. 착시였다고 우겨볼까.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고 할까. 근데 어떤 변명도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손에서 물건이 갑자기 생겨나는 걸 조명 문제로 설명하는 건 누가 봐도 억지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휴대폰에 하은이한테서 문자가 하나 왔다. [오빠 아까 그거 뭐였어. 진짜 이상했어. 나 집에서 계속 생각났는데 다시 얘기해줘야 될 것 같아.] 나는 그 문자를 보며 숨이 턱 막혔다. 수업이 끝나가는 종소리가 멀리서 울리는 것 같았는데, 그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손에 쥔 휴대폰 화면 속 글자들이 계속 눈앞에서 맴돌았다. '다시 얘기해줘야 될 것 같아'라는 그 말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오늘 안에 뭔가 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