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해급 슬라임 테이머

1화

나는 테이머다. 이 말을 할 때마다 목소리가 자동으로 작아지는 건 내 잘못이 아니다. 한국헌터관리청이 정한 각성 직업 등급표에 따르면, 테이머는 F등급. 전사, 마법사, 성검사, 힐러 밑으로 도적, 궁수, 연금술사, 요리사, 그리고 맨 밑바닥에 테이머가 있다. 요리사보다 아래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적어도 요리사는 배달앱에 입점할 수 있다. 심지어 별점 테러를 당해도 리뷰 이벤트로 커버가 된다. 테이머는 그런 것도 없다. 계약 몬스터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직업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계약 몬스터가 없다. [각성 등급 : 테이머 (F)] [전투 기여도 : 0%] [사회적 취급 :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마지막 줄은 시스템이 알려준 게 아니라 내가 붙인 각주다. 하지만 반박할 사람은 없을 거다. 있다면 나와서 반박해봐라, 진심으로 궁금하다. 헌터 아카데미 3학년 6반, 서울 강북구 어딘가. 각성일 6개월째, 나는 여전히 계약 몬스터 없는 테이머로 등교하고 있다. 담임은 출석부를 부를 때마다 잠깐 멈칫한다. "이도훈... 아직도 없니?" "네, 아직도 없습니다." 반 애들이 웃는다. 정확히는 웃는 게 아니라 낄낄거린다. 그 미묘한 온도차를 이제는 구분할 수 있다. 웃음소리에 익숙해지는 것도 재능이라면, 나는 그 방면으로 S급이다. 전투력은 0인데 굴욕 내구도만 만렙이라니, 밸런스 패치가 필요한 캐릭터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반에 차은성이라는 놈이 있다. 성검사, A등급, 몸값으로 치면 강남 아파트 전세보증금은 우습게 넘는다는 소문이 있다. 걔가 검을 한 번 휘두르면 SNS 조회수가 백만을 넘는다. 지난주에는 던전 클리어 영상이 실시간 검색어 1위까지 올라갔다. 내가 손을 한 번 휘두르면 아무도 안 본다. 당연하다, 휘두를 게 없으니까. 차은성은 오늘도 복도에서 나를 스쳐가며 딱 한 마디 던졌다. "아직도 계약 못 했냐."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이미 그 자식 검을 열 번쯤 부러뜨렸다. 물론 상상 속에서만. [사무엘상 17:33,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그와 싸울 수 없느니라] 다윗은 그래도 돌팔매는 있었지. 나는 돌팔매도 없다. 있었다면 진작에 차은성 뒤통수에 한 방 먹였을 거다. 물론 그랬다간 학교폭력위원회 직행이겠지만. * 방과 후에는 알바를 한다. 헌터관리청 산하 '서울 제3 몬스터 폐기물 관리소'. 말이 거창하지 실상은 죽거나 상태 불량으로 은퇴한 계약 몬스터, 혹은 계약 파기된 잔여 개체들을 임시 보관하다가 정식 폐기 절차로 넘기는 창고다. 시급은 최저임금보다 500원 더 준다. 대신 냄새가 최저임금의 두 배로 난다. 가끔은 그 냄새가 내 인생을 요약하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썩어가는데 아무도 안 치워주는 것, 그게 딱 내 처지 아닌가. 나는 이 알바를 6개월째 하고 있다. 왜냐고 물으면, 여기가 유일하게 테이머라고 무시하지 않는 곳이라서다. 정확히는, 무시할 시간도 없이 다들 바쁘다. 관리소장 아저씨는 서류에 파묻혀 살고, 나는 창고 청소와 사료 배급, 그리고 폐기 대상 개체 명단 체크를 담당한다. 동료로는 나 말고 알바생이 한 명 더 있는데, 이름은 모른다. 서로 이름을 물어본 적이 없다. 그냥 "야" 아니면 "저기요"로 6개월을 버텼다. 어쩌면 이게 진짜 사회생활의 정석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명단을 확인하러 지하 3층 보관동으로 내려갔다. 촤르르르륵! 철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형광등 몇 개는 죽어서 깜빡였다. 분위기가 딱 폐가 체험 컨셉인데, 여긴 실제로 슬라임 무덤이다. 입장료를 받아도 될 것 같다, 물론 아무도 안 오겠지만. 보관동 안쪽 유리 수조들 안에는 슬라임들이 층층이 갇혀 있었다. 대부분 색이 탁하다. 건강한 슬라임은 맑은 하늘색이나 연두색을 띠는데, 여기 있는 놈들은 흙탕물색, 아니면 아예 회색에 가깝다. 계약이 파기되거나 던전에서 버려진 슬라임들, 소위 '폐기슬라임'. 개중에는 몸통이 반쪽만 남은 놈도 있고, 표면이 쩍쩍 갈라져서 곧 부스러질 것 같은 놈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섭다. 근데 익숙해지면 그냥 콘크리트 벽처럼 느껴진다, 사람이란 참 편리한 동물이다. [요한복음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형광등이 어둠에 비치되, 형광등이 나가서 별 소용이 없더라. 관리소장 아저씨한테 형광등 좀 갈아달라고 세 번째 말하는 중이다. 세 번 다 "다음 주에"라는 답을 받았다. 다음 주는 영원히 오지 않는 개념인 것 같다. 명단을 훑던 중, 구석 수조 하나가 유독 조용하다는 걸 눈치챘다. 다른 슬라임들은 몸을 움찔거리거나 최소한 부풀었다 줄었다 하는 반응을 보이는데, 그 수조 안의 개체는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색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걸레 삶은 물 색. 좋게 말해도 걸레 삶은 물 색이다. 비유가 너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직접 보면 이보다 정확한 표현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명찰을 보니 폐기 예정 스탬프가 이미 찍혀 있었다. [폐기 예정 : D-3] 사흘 뒤면 이 녀석은 소각된다는 뜻이다. 소각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사무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도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다. 딱히 감상적인 성격은 아니라고 자부하는데, 이상하게 그 걸레 물색 슬라임 앞에서 발이 멈췄다. 왜인지는 나도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발이 자기 마음대로 멈췄다, 이게 최선의 설명이다. "넌 뭔데 이렇게 조용해." 말을 걸어봤다. 대답이 있을 리 없다. 슬라임한테 대답을 바라는 것도 웃긴 일이다. 그래도 명단 체크하는 동안 심심하니까 계속 말을 걸었다. "너는 왜 폐기 예정이야, 뭘 잘못했는데." "D-3이면 진짜 얼마 안 남았네." 혼잣말인지 대화인지 구분이 안 가는 발화가 5분쯤 이어졌다. 관리소 안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 이상한 눈으로 봤을 거다. 그런데 그때, 아주 작게, 정말 아주 작게. 뿌글... 수조 밑바닥에서 기포 하나가 올라왔다. 뭐지? 반응이 있다고? 다른 슬라임들은 내가 서 있는 걸 신경도 안 쓰는데, 이놈만 유독 뭔가 알아챈 것 같았다. 설마, 착각이겠지. 죽어가는 슬라임이 마지막 힘으로 방귀 뀐 정도의 이벤트일 확률이 99퍼센트다. 아니 슬라임한테 방귀라는 개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물학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적어도 내가 배운 헌터 생물학 수업에서는. 혹시 몰라서 한 번 더 손을 흔들어봤다. 반응 없음. 그럼 그렇지. 아까 그건 진짜 우연이었나보다, 라고 정리하려는 순간. 뿌글, 뿌글... 이번엔 두 개다. 기포가 두 개나 올라왔다. 이건 좀 이상한데. 슬라임 관찰 경력 6개월이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 본다. 다른 죽어가는 개체들은 보통 미동도 없이 있다가 어느 순간 그냥 색이 더 탁해지면서 조용히 사그라든다. 근데 이놈은 뭔가...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착각이면 심각한 착각이고, 아니면 진짜 심각한 일이다. 하지만 나머지 1퍼센트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관리소장 아저씨한테 이 개체 관련 서류를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 순간이었다. 명단에는 개체 이력이랄 게 거의 없었다. '출처 : 불명' '계약 이력 : 없음' '특이사항 : 없음'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서류다, 나랑 참 닮았다. 소장실 문을 두드리기 전, 나는 다시 그 수조를 돌아봤다. 걸레 물색 덩어리는 다시 완전히 정지해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만 이상한 걸 본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완벽한 정지였다. 사흘 남았다는 스탬프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왜 저게 자꾸 눈에 밟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인데, 발이 안 떨어진다. 소장실 문 앞에 서서, 나는 손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그리고 다시 그 수조 쪽을 돌아봤다. 뿌글. 또다. 이번엔 확실히 봤다, 착각이 아니다. 저 안에서 뭔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스르륵 올라왔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