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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떨어지는 순간, 몸이 무겁지 않다는 게 이상했다. 오히려 가벼웠다. 마치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던 무언가를 벗어던진 것처럼.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시야가 흐려지고, 세상이 뒤집혔다.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은 이상하게 차분했다. '아, 이제 끝이구나.' 마감에 쫓기던 서류들, 팀장의 잔소리, 통장에 찍힌 마이너스 숫자. 그 모든 게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것도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암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어둠이었다. 다시 감각이 돌아왔을 때,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먼저 이상했다. '죽었어야 하는데.'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그 증거가 반갑지 않았다.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뭐지, 이거.' 눈을 떴다. 천장이 낯설었다. 낮은 형광등, 색이 바랜 벽지, 어딘가 병원 같기도 하고 어딘가 시설 같기도 한 방. 퉁- 하고 작은 벌레 한 마리가 창틀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마저도 선명하게 들렸다.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팔이,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말을 듣지 않는 게 아니라, 너무 가벼워서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마치 솜으로 만든 인형을 조종하려는 느낌이었다.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왔다. 작았다. 손가락이 짧고, 마디가 없고, 손톱 끝이 동글동글했다. '뭐야, 이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관절이 부드럽게, 지나치게 부드럽게 움직였다. 성인 남자의 손목이라면 절대 이런 각도로 꺾이지 않는다. 나는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옆에 놓인 작은 화장대로 다가갔다. 걸음이 뒤뚱거렸다. 마치 처음 걷는 법을 배우는 사람처럼.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냉기조차 낯설었다. 원래 내 몸이었다면 이 정도 냉기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발가락 끝까지 오소소 떨렸다. 화장대 위 거울에, 낯선 얼굴이 있었다. 둥근 볼, 큰 눈, 짧은 단발머리. 다섯 살, 어쩌면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이게··· 나야?' 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거울 속 아이도 똑같이 얼굴을 만졌다.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게 나였다. 허망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는 순간에도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죽으려고 뛰어내렸는데, 살아있었다. 살아있는데, 내가 아니었다. 아니, 내 몸이 아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설마 나, 다시 태어난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됐으니까, 오히려 그 말도 안 되는 설명이 제일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거울 속 아이의 눈을 다시 들여다봤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분명 내 감정이었다. 몸은 남의 것인데, 눈에 담긴 동요는 확실히 내 것이었다. '그럼 나는 뭐야, 이 몸을 빌려 쓰는 거야, 아니면 이 몸에 갇힌 거야.'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이었다. 그 자리에 앉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작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바닥이 얼굴 전체를 다 덮었다. 원래 같으면 손바닥 반쪽도 못 가릴 얼굴 크기였을 텐데. '작다, 진짜 작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익숙한 리듬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덜컥, 문이 열렸다. "서아야, 일어났니?" 삼십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목소리에는 익숙한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는 말인 것처럼. '서아? 내가 서아야?' 그 이름이 낯설고, 동시에 어딘가 내 안에 스며 있었다. 마치 원래 내 이름이었던 것처럼, 몸이 먼저 그 이름에 반응했다. 목덜미가 움찔했다. 이 몸의 주인은 이 이름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반응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게 더 소름 끼쳤다. "이서아, 대답 안 하니?" 여자가 다가와 내 어깨를 짚었다. 따뜻한 손이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낯설면서도 편안했다. 이 몸에는 익숙한 사람의 손길인 게 분명했다. 순간, 나는 뭔가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입을 열었다. "저, 저는요, 사실은 강민준이라고···" 말을 뱉는 순간 스스로도 놀랐다. 목소리가, 새된 아이의 목소리였다. 분명 내 머릿속에서는 삼십대 남자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흘러나온 건 앙증맞은 어린애의 발음이었다. 혀가 짧아서 자음 하나도 제대로 발음이 안 됐다. '강, 민, 준.' 세 글자를 말하는 데도 턱이 뻐근했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었다. "아이고, 우리 서아 또 그 놀이하니? 강, 뭐라고?" "강민준이요. 저는 원래 회사원이었고, 정일산업에서···" "그래, 그래. 회사원이었구나." 여자는 내 말을 끊지 않았지만,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의 상상 놀이를 받아주는 어른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무엇보다 무서웠다. '안 먹혀.' 아니, 안 먹힌다는 표현조차 이 상황을 다 담지 못했다. 여자는 아예 내 말을 진지하게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마치 다섯 살짜리 아이가 하는 소리는 애초에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듯이. 나는 필사적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예요, 진짜로 저는 어른이었어요, 서른둘이었고, 아파트 옥상에서···" 말이 뒤엉켜 나왔다. 발음이 자꾸 새서, 하고 싶은 말의 절반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여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그래, 옥상에서 슈퍼 히어로 놀이 했구나. 우리 서아 상상력 좋네." '아니라고,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고!' 속으로 소리쳤지만, 입 밖으로는 그저 "으으" 하는 답답한 소리만 흘러나왔다. 나는 그제야, 이 몸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했다. 말을 해도 전달되지 않는 몸. 생각은 어른인데 표현은 아이인 몸. 이보다 더 큰 감옥이 있을까 싶었다. "서아야, 밥 먹어야지. 다른 애들도 다 기다려."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작은 손, 큰 손. 어른이 되어본 사람과, 처음부터 어른인 사람. 나는 어느 쪽에 속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손을 잡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여자가 나를 부축하듯 살짝 힘을 줬다. "어이구, 아직도 잠이 덜 깼나 보네. 우리 서아 요즘 밤에 잘 못 자지?"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아이가 원래 어떤 아이였는지, 요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방문을 나서자, 복도 끝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사랑 보육원'이라는 글자가 낡은 나무 액자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육원이구나.' 부모가 없다는 뜻이었다. 허망함이 한 번 더 밀려왔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 것도 모자라, 부모조차 없는 아이의 몸으로. 복도를 지나며 마주친 몇몇 아이들이 나를 힐끔거렸다.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옆의 아이에게 뭔가 소곤거렸다. 그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호기심이 아니라, 뭔가를 감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뭐지, 저 눈빛은.' 이건 대체 무슨 벌인지, 아니면 무슨 상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까지 겪은 모든 혼란보다 훨씬 더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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