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떠맡은 보모, 신화가 되다

1화

마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는, 여기 있는 다른 엘프들 눈에는 안 보인다. 나한테는 보인다. 그게 문제였다. 숲속 오두막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 속에서 나는 반나절째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눈앞에 떠 있는 희미한 입자들, 공기 중에 흩어진 은빛 가루 같은 것들이 조금씩 손끝으로 모여드는 걸 지켜보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모으는 중이었고, 정확히는 실패하는 중이었다. 이 입자들은 재밌는 성질이 있는데, 집중하면 모이고 딴생각을 하면 흩어진다. 문제는 집중해도 모이다 말고 흩어진다는 거였다. 여든다섯 해를 이 짓만 했는데도 아직 이 정도다. 전생에 엑셀 시트 하나 만드는 데도 이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 쩌엉. 손끝에서 작은 불꽃이 터지고 화상까지는 아니지만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다. 나는 손을 흔들며 욕을 삼켰다. 익숙한 통증이었다. 이 정도면 오늘 세 번째였고, 어제는 다섯 번이었으니 그래도 발전이라고 우겨볼 만했다. 죽기 전엔 나도 평범한 한국 남자였다. 서울 어딘가 회사에서 야근하다가 과로로 쓰러졌고,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숲속 나무 그늘 아래 갈색 피부의 여자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게 지금의 나, 이슬이다. 성별이 바뀐 것도 억울한데 종족까지 바뀌었다. 그것도 순수 엘프가 아니라 다크엘프로. 어머니는 새하얀 피부의 순수 엘프고, 아버지는 다크엘프였다는데 나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이 없다. 아마 그것도 팔십오 년 전 얘기니까. 남아 있는 거라곤 어머니가 술 취한 밤에 딱 한 번 흘린 말, “그 사람 손끝이 유난히 차가웠다”는 것뿐이었다. 그게 사인인지 비유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거였다. 이 세계에는 마법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마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엘프들은 활을 쏘고 검을 휘두르고 나무를 타는 데는 인간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났지만, 그 흔한 파이어볼 하나도 없었다. 나는 전생 지식 반, 어쭙잖은 시행착오 반으로 이 세계 최초로 마나를 감지하고, 그걸 억지로 끌어와 뭔가를 만들어보려 애쓰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게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라는 게 이 동네 정서였다. 며칠 전에는 우물가에서 아주머니 셋이 나를 두고 수다 떠는 걸 들은 적도 있다. “그 집 딸 또 방구석에서 불장난한다며.” “그러니 시집도 못 가지.” “다크엘프라 그런가 봐, 원래 좀 그런 애들이 이상하잖아.”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대꾸 없이 지나갔다. 이런 걸로 싸워봤자 득 볼 게 없다는 계산이 먼저 섰기 때문이다. 감정보다 손익이 먼저 뜨는 것도 팔십오 년 동안 굳어버린 습관이었다. "이슬."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나는 하마터면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문 앞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우리 어머니, 설화였다. 이 아줌마는 천팔백 살이 넘었다는데 외형은 나보다 어려 보이는 이십 대 후반이었다. 활을 등에 멘 채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자세가 벌써 심상치 않았다. "또 그 이상한 짓 하고 있었니." "연구예요, 어머니. 이상한 짓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은 그걸 마귀 부리는 짓이라고 하더구나." 그럴 줄 알았다. 이 마을 엘프들에게 나는 딸이 아니라 소문의 재료였다. 방구석에 처박혀 손끝에 불꽃을 튀기는 이상한 다크엘프. 활 한 번 안 쏘고 검 한 번 안 잡는, 엘프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존재. 심지어 지난달엔 마을 원로가 대놓고 어머니한테 “딸을 신전에 데려가 정화라도 받게 하라”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정화가 뭘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나한테 좋은 절차는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부탁이 있어서 왔다." 부탁이라는 말이 어머니 입에서 나오면 그건 부탁이 아니라 통지였다. 나는 이미 몸이 굳는 걸 느끼며 팔짱을 꼈다. "들어보고 결정할게요." "들을 필요도 없어. 이미 결정된 일이니까." 말이 많아진다. 이 사람은 늘 이렇게 시작한다. 결정된 일이라고 못 박아놓고, 그다음에야 뭔지 말해준다.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걸 미리 알려주는 방식이었다. 나는 이 패턴을 팔십오 년째 겪고도 매번 당하는 게 신기했다. "마을 아이들 일곱을 며칠 봐줘야겠다." "제가요?" "네가." "저는 아이도 안 키워봤고, 애초에 애들이랑 안 맞아요. 그런 일은 그런 일 잘하는 사람한테 시키셔야죠. 이 동네에 애 좋아하는 아줌마들 넘치잖아요." "동네에 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 부탁하는 거니." 어머니는 잠시 말을 끌었다가 이었다. "네가 방구석에만 있으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니. 미친 짓 하는 다크엘프 딸년 키운다고 나까지 손가락질받는다. 이참에 마을 일도 좀 돕고, 아이들이랑 어울리면서 사람 좀 되란 말이다." 사람 좀 되란 말이다. 이 말이 나오면 끝이었다. 어머니 논리에서 나는 늘 사람이 덜 된 존재였고, 그 부족분을 채우는 방법은 항상 내가 원치 않는 사회 활동이었다. 지난번엔 활쏘기 대회에 억지로 끌려나가 첫 발에 과녁 대신 옆 사람 발치를 맞춘 적도 있다. 그때도 어머니는 “사람 좀 되라”고 했다. "보상은요." "보상?" "공짜로 봐달라는 건 아니겠죠. 마나 결정석 몇 개라도 구해다 주시면 생각해볼게요." 어머니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 여자는 딸이 흥정하는 걸 싫어하면서도 매번 흥정에 응했다. 그게 우리 모녀 사이 유일한 소통 방식이기도 했다. "결정석 두 개." "다섯 개요." "두 개에서 한 개도 안 올린다." "그럼 아이들은 다른 분 보고 부르시죠. 마을에 애 좋아하는 아줌마 많다고 방금 그러셨잖아요." "세 개." "···네 개면 할게요." "세 개에서 안 물러선다. 이 이상은 안 줘. 너 그러다 상단에 있는 놈들한테 사기당한다." 상단 얘기까지 나오는 걸 보니 진짜 여기서 더는 안 올라갈 모양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잠깐 계산했다. 결정석 세 개면 다음 실험 재료로 충분했다. 아이 일곱 며칠 보는 노동력 대가로는 나쁘지 않은 값이었다. "세 개, 좋아요. 대신 상급으로 주세요. 하급 섞어서 주시면 계약 무효예요." "상급으로 주마." 결국 세 개로 낙착됐다. 나쁘지 않은 흥정이었다. 결정석은 마나를 압축해 담은 희귀한 광물로, 이 세계에서는 아무도 그 진짜 용도를 몰랐다. 장신구로나 팔리는 그 돌을 나는 연구 재료로 써먹고 있었다. 하급 결정석 하나로도 며칠 치 실험 분량이 나오는데, 상급이면 못해도 한 달은 버틴다. "그런데 왜 하필 저예요? 다른 사람도 많잖아요. 저 말고도 애 안 키워본 사람 많은데 왜 굳이 저한테." "네가 딱 맞으니까." "딱 맞는 이유가 뭔데요." 어머니는 그 말만 남기고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했다. 어머니가 뭔가를 숨기고 있을 때 짓는 표정이 있는데, 눈은 웃고 있는데 입꼬리가 살짝 굳는 그 표정이 지금 정확히 떠 있었다. 팔십오 년을 봐온 표정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저 표정이 뜨면 대개 뒷감당이 큰 일이 따라왔다. 하지만 결정석 세 개에 눈이 뒤집혀 있던 나는 그 표정을 그냥 지나쳤다. 지나친 게 아니라, 지나치기로 스스로 결정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도 습관이라면 습관이었다. "애들이 몇 살이에요? 밥은 뭘 먹여요? 다치면 어떻게 해요?" "내일 아침에 마을 광장으로 나오면 다 알게 될 거다." "그게 대답이 아니잖아요." "내일 아침에 마을 광장으로 나와라. 애들 데리고 갈 테니." 어머니가 문을 닫고 나간 뒤, 나는 다시 손끝의 마나 입자를 바라봤다. 여전히 은빛으로 흩어져 있었다. 아이 일곱쯤이야 뭐 별거 있겠나 싶었다. 활도 못 쏘고 검도 못 잡는 다크엘프라도, 애 몇 며칠 봐주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결정석 세 개를 받으면 뭘 실험할지 벌써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었다. 손끝에서 불꽃 대신 뭔가 형체를 만들어보는 것, 그게 다음 목표였다.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는, 다음 날 광장에서야 알게 됐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