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년 배신, 흙마법사 재기

5화

훅- 서하린의 손끝에서 회오리 같은 바람이 일었다. 좁은 골목 안에서도 그 바람은 사방의 담벼락을 긁으며 소리를 냈다. "먼저 몸을 좀 가볍게 해줄게." 서하린이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 웃음은 여유로웠다. 2년을 함께한 도윤을 상대로 진심을 다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는 웃음이었다. 쉭- 바람의 칼날이 도윤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로브가 찢어지며 살갗이 얇게 베였다. "윽!" 도윤이 한 걸음 물러서며 신음을 삼켰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통증이 오히려 감각을 날카롭게 만든다는 것을, 도윤은 이전 던전에서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맞으면 끝난다.' 도윤은 그렇게 판단하며 흙 주머니의 매듭을 풀었다. 손끝이 떨렸지만, 매듭을 푸는 동작만큼은 정확했다. 수백 번 반복했던 손놀림이었다. 박거석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리를 좁혔다. 거구의 몸이었지만 움직임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표사 출신의 몸놀림이란 걸, 도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퍽! 거대한 주먹이 도윤이 방금 세운 얇은 흙벽을 단숨에 부수었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윤은 그 먼지 속에서 몸을 굴려 간신히 충격을 피했다. 바닥에 어깨를 부딪히며 데굴데굴 굴렀고, 등허리로 통증이 훅 밀려왔다. "제법이네. 그냥 흙집게는 아니었나." 박거석이 낮게 웃으며 다시 팔을 들었다. 그 웃음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 그저 방벽이나 세우는 잡일꾼 정도로 여겼던 상대가 조금이라도 버텨내는 걸 신기해하는 웃음이었다. "저는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그냥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도윤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존댓말이었다. 궁지에 몰려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어조였다. "그건 우리가 정할 일이 아니야." 서하린이 다시 손을 들었다.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도윤을 중심으로 좁혀들었다. 골목의 벽은 이미 그의 퇴로를 완전히 막고 있었다. 왼쪽도, 오른쪽도, 등 뒤도 모두 막다른 벽이었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다.' 도윤은 그렇게 자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다른 감정이 먼저 올라왔다. 분노였다. 2년간 쌓아온 신뢰가 이런 식으로 짓밟히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함께 던전을 돌며 나눠 먹었던 밥, 나눠 마셨던 술, 서로의 등을 맡겼던 순간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서하린의 웃음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변해버렸다. +++ "준혁 씨는... 정말 이런 것까지 지시했습니까." 도윤이 이를 악물며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글쎄, 직접 말한 건 아니지만 눈치는 그렇게 주더라고. 조용히 처리해달라고." 서하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였다. 사람 하나를 없애는 일을 마치 심부름 하나 처리하듯 말하는 투였다. 그 무심한 대답이 도윤의 가슴을 더 깊이 후볐다. '2년 동안 함께 던전을 돌았던 사람이,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려고 했다니.' 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는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그래도 등을 곧게 세웠다. 어릴 적 아버지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넘어졌다고 그 자리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했다. 방벽을 세우던 손으로 흙바닥에 앉아 쉬고 있을 때마다, 아버지는 그 옆에 앉아 같은 말을 반복했다. "흙은 무너져도 다시 다질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도윤은 그저 흘려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골목 안에서 그 말이 뼈에 새겨진 것처럼 되살아났다. 지금은 넘어질 때가 아니었다. 도윤은 흙 주머니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마력이 손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평소와는 다른 흐름이었다. 방벽을 세우는 익숙한 감각이 아니라, 뭔가 더 복잡하고 낯선 흐름이 손을 타고 흘러나왔다. 마치 흙 자체가 스스로 무언가를 원하는 것처럼, 손끝을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이건... 뭐지.' 도윤은 그 낯섦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 서하린의 손끝에서 다시 바람이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 서하린이 다시 손을 뻗었다. "이제 끝내자." 서하린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지금까지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바람이 칼날처럼 응축되며 도윤을 향해 쏘아졌다. 쉭- 그 순간, 도윤의 발밑에서 흙이 솟아올랐다. 평소처럼 단순한 벽이 아니었다. 흙이 뭉치고 뒤틀리며, 어떤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사람의 형상과 비슷한 무언가였다. 도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흙은 스스로 관절을 접고 팔을 뻗는 각도를 만들어냈다. '이게 뭐야.' 도윤조차 자신이 만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손끝에서 흘러나가는 마력의 양은 평소의 몇 배는 되는 것 같았지만, 도윤은 그것을 막을 방법도, 막을 이유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형체는 스스로 팔을 들어 바람의 칼날을 막아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흙으로 만든 팔이 부서졌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흙먼지가 도윤의 얼굴을 스쳤다. 하지만 도윤은 그 충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 한 번의 방어가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을 거란 걸, 도윤은 온몸으로 느꼈다. 서하린의 눈이 순간 커졌다. "이게 무슨..." 서하린이 말을 잇지 못했다. 손에 쥐고 있던 바람의 기세가 잠시 흔들릴 정도로, 그 흙의 형체는 예상 밖의 것이었다. 박거석 역시 걸음을 멈추고 도윤 옆의 흙덩이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몸을 가진 사내였지만, 그 시선만큼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경계심을 담고 있었다. 무영창으로도 쉽게 만들어낼 수 없는, 스스로 판단해 움직인 것처럼 보이는 흙의 형체였다. '나도 몰랐던 힘이었다.' 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고, 손바닥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도윤 자신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처음으로 반응했다는 감각만은 분명했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서하린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었다. "뭐가 됐든, 상관없어." 서하린이 마녀모자를 고쳐 쓰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말투에는 조금 전의 당황을 지우려는 억지스러운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바람이 다시 골목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벽을 타고 흐르는 바람의 소리가 골목 안을 가득 채웠다. 박거석도 주먹을 쥔 채 천천히 다가왔다. 느릿한 걸음이었지만, 그 걸음 하나하나에 조금 전과는 다른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도윤은 부서진 흙덩이의 잔해를 내려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그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한 번 더 만들 수 있을까.' 그런 확신도 없이, 도윤은 다시 흙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흙 알갱이가 부스러지듯 흘러내렸다. 아까와 같은 낯선 흐름이 다시 손끝을 타고 흐를지, 아니면 이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지,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었다. 골목의 양 끝은 완전히 막혀 있었고, 서하린과 박거석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본 이상한 힘 때문에, 두 사람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더는 여유를 부릴 상대가 아니라는 판단이, 그들의 표정 위에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팽팽한 대치 속에서, 서하린의 손끝에 다시 한 번 거센 바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바람의 크기는,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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