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년 배신, 흙마법사 재기

1화

황금검단의 아침은 언제나 분주했다. 의뢰판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대장간에서는 쇠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막 잡은 몬스터 부산물을 흥정하는 목소리와 신입 표사들의 발소리가 뒤섞여, 이곳이 대륙에서 손꼽히는 헌터 조직의 아침이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강도윤은 그 소란 속에서도 홀로 조용한 구석에 앉아 흙을 만지고 있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뒷마당 한쪽,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자리였다. 토속성 마법사에게 던전은 그리 반가운 일터가 아니었다. 화속성은 화력을, 수속성은 치유를, 풍속성은 기동력을 자랑했지만 토속성은 대개 방벽이나 함정을 만드는 데 그쳤다. 누군가는 그것도 훌륭한 재능이라 말했지만, 정작 전장에서 그 말을 실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번 생에도 눈에 띄는 재주는 없구나.' 도윤은 흙덩이를 손끝으로 굴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흙은 그의 손에서 형태를 바꾸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마치 그의 2년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원래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 전생에는 야근과 철야가 일상이던 회사원이었고, 어느 새벽 사무실 책상에서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이 낯선 대륙의 하늘 아래였고, 도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몸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마법이라는 것을 배웠고, 운 좋게도 S랭크를 노리는 젊은 파티, 황금검단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2년이었다. 그 세월 동안 도윤은 묵묵히 방벽을 세우고 함정을 파며 동료들의 뒤를 받쳤다. 누군가 화려하게 몬스터를 쓰러뜨릴 때, 그는 그 발밑의 땅을 단단하게 다지는 일을 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그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었다. '묵묵히 하는 것도 재능이다.' 언젠가 그의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었다. 전생의 아버지였다. 야근을 마다하지 않던 아버지는 늘 그런 말로 아들을 다독였다.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도윤은 조금 위로가 되는 듯도 했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헛헛하게 느껴졌다. "강 마법사, 오늘도 일찍 나왔군." 서준혁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금발에 벽안, 어딜 가나 시선을 끄는 외모였다. 왕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우아한 그가 웃으면, 주변 여인들은 물론 남자들도 넋을 놓았다. 지나가던 신입 표사 몇이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서준혁을 돌아보았다. "준혁 씨도 일찍 나오셨네요." 도윤이 흙을 털며 일어섰다. 손바닥에 남은 흙 자국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오늘 던전 브리핑이 있으니 다들 모이라고 했어. 자네도 와." 서준혁의 말투는 언제나 정중했지만, 그 정중함 뒤에는 어떤 계산이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도윤은 그렇게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요 며칠 서준혁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졌다는 것을, 도윤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 브리핑 장소에는 이미 동료들이 모여 있었다. 성직자 김세아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았다. 금발을 곱게 묶은 그녀는 서준혁의 약혼녀였고, 파티 내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다. "도윤 씨, 이번 던전은 좀 깊은 곳이라 다들 긴장하고 있어요." 김세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손끝에는 어젯밤 늦게까지 치유 마법을 연습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야 늘 뒤에서 방벽만 세우는걸요." 도윤이 웃으며 답했다. 그 웃음이 어딘가 씁쓸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화속성 마법사 하나가 옆에서 검을 손질하며 낄낄거렸다. "강 마법사는 뒤에 있는 게 제일 안전하잖아. 부럽다니까." 악의는 없는 말이었지만, 도윤은 그 말속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당하는 기분이었다. 브리핑이 시작되자 서준혁이 지도를 펼쳤다.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에는 붉은 표식이 몇 군데 그려져 있었다. "이번 던전은 마나 광석이 매장된 지역이야. 성공하면 우리도 정식 S랭크로 승격할 수 있어." 서준혁의 목소리에 열기가 실렸다. S랭크. 그 두 글자가 나오자 파티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누군가는 주먹을 쥐었고, 누군가는 나직이 숨을 삼켰다.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2년간 고생한 보상이 눈앞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나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도윤은 그렇게 기대를 품었다. 그 기대는 작았지만, 그에게는 오랫동안 품어보지 못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 던전은 예상보다 훨씬 위험했다. 입구에서부터 습한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고, 벽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파티원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돌바닥이 무너지는 곳마다 도윤이 흙벽을 세워 동료들의 퇴로를 지켰고, 함정이 있는 구간마다 그가 미리 흙을 굳혀 안전한 길을 만들었다. 쿠구궁- 바닥이 갈라지며 무너지려는 순간, 도윤의 손끝에서 흙이 솟아올라 균열을 메웠다. 누군가 그 위를 밟고 지나가며 짧게 "고마워"라 던졌지만, 그 인사는 바쁜 걸음 속에 곧 흩어졌다. 그럼에도 전투가 벌어지면 그의 존재감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화속성 마법사가 화염구를 날리고, 검사가 검을 휘두르는 사이, 도윤의 흙벽은 그저 배경처럼 취급되었다. 화르륵- 불길이 몬스터를 집어삼키는 광경에 파티원들이 함성을 질렀지만, 그 함성 속에서 도윤은 그저 방벽을 하나 더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겠지.' 도윤은 자신의 마법을 그렇게 낮춰 평가했다. 던전을 나설 무렵, 파티는 목표한 마나 광석을 손에 넣었다. 환호성이 터졌지만 그 환호 속에 도윤의 이름은 없었다. "오늘도 고생했어, 다들." 서준혁이 동료들을 하나하나 격려하며 지나갔다. 검사의 어깨를 두드리고, 화속성 마법사의 활약을 치켜세우고, 김세아의 치유에 감사를 전했다. 도윤에게도 그런 말을 건넸지만, 형식적인 인사에 불과했다. "자네도... 고생했어." 서준혁의 시선은 도윤의 얼굴이 아니라 그 뒤편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도윤은 그렇게 느꼈지만 이유를 명확히 짚어내지 못했다. 그날 밤, 도윤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지난 2년을 하나씩 되짚어보았지만, 특별히 잘못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 며칠 후, 서준혁이 도윤을 따로 불렀다. 길드 지부의 작은 응접실이었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고, 그 붉은 빛이 서준혁의 얼굴을 반쯤 물들였다. 방 안에는 낡은 탁자와 의자 두 개, 그리고 벽에 걸린 황금검단의 깃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서준혁이 자리에 앉으며 운을 뗐다. "말씀하세요." 도윤은 짐작하지 못한 채 담담히 응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지만, 도윤의 손끝은 무릎 위에서 조금씩 흙을 만지고 있었다. 긴장할 때마다 나오는 오래된 버릇이었다. "우리 파티가 정식으로 S랭크 승격 심사를 받게 됐어." 서준혁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도윤이 진심으로 웃었다. 2년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 웃음에는 안도감마저 섞여 있었다. 마침내, 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서준혁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탁자 위에 올려둔 그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도윤은 뒤늦게 알아챘다. "그런데 심사 기준에 파티원 개개인의 전투력도 포함돼. 상급 던전에선 토속성만으로는..." 서준혁이 말을 흐렸다. '그건...' 도윤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할게. 이번 심사를 위해 새로운 마법사를 영입했어." 서준혁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계약서였다. 잉크 냄새가 아직 마르지 않은 듯 선명했다. 도윤의 이름이 파티원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낯선 이름 하나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자네는... 오늘부로 황금검단에서 나가줘야겠어." 서준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도윤의 가슴을 더 깊이 찔렀다. '2년을 함께했는데.' 도윤은 그렇게 되뇌었지만,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계약서 위,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그 빈자리에 오래 머물렀다. 서준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노을빛 속에서 조용히 도윤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방 안에는 노을빛만 가득했고, 그 빛은 조금씩 어둠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도윤은 문득 자신이 지금까지 세워온 흙벽들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다시 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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