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하사받은 영지가 잿더미라니

4화

마을 중앙 광장 같은 공간에 커다란 화로가 타고 있었다. 불길이 사람 키만큼 치솟았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고, 그 불빛이 사람들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 나는 그 한가운데 서서 온갖 시선을 받아내고 있었다. 뿔 달린 아이, 등이 굽은 노인, 팔뚝이 두꺼운 청년까지. 어느 누구도 나를 반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자리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 몇몇은 눈살을 찌푸린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화로 옆에 걸린 커다란 솥에서 뭔가 끓고 있었는데, 냄새로 짐작하기엔 그리 풍족한 재료는 아닌 듯했다. 훅, 하고 매운 연기가 코끝을 찔렀다. "저 인간을 왜 데려온 거냐, 유하." 짙은 색 뿔의 노인이 다시 물었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어르신, 이 사람이 잿골의 새 영주라고 합니다." "영주? 인간들이 지 맘대로 정한 자리를 우리가 왜 신경 써야 하지?" 노인의 말투는 차가웠다. 주변에서도 낮은 동조의 소리가 흘렀다. 누군가는 대놓고 침을 뱉었고, 그 침이 화로 근처 자갈 위에서 치익, 소리를 내며 말랐다. 와, 첫 만남부터 여론조사 결과가 아주 참신하네. 이 정도면 지지율 0퍼센트도 후하게 준 거 아닌가. "어르신 말씀이 맞소." 내가 입을 열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상 못한 대답이었을 거다. 심지어 유하도 옆에서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꼭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오. 서류상으로만 영주고, 실제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소." "…그럼 왜 여기 있어?" 노인이 되물었다. "살 곳을 찾아야 했고, 당신들을 굶겨죽일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오." 정적이 흘렀다. 타닥, 타닥, 화로 속 나무 타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누군가의 숨소리, 어린아이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협곡 바람 소리까지. 그 모든 게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우리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십 년 전, 인간 영주는 화산이 터지자 우리를 버리고 도망쳤어. 그 뒤로 인간이라면 다 똑같다고 배웠다." 그 말에 뭔가 명치를 콱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왕실이 버린 땅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사람까지 버렸다는 건 몰랐다. 서류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아니, 있었어도 다들 적당히 미화해서 써놨겠지. '영주 부재로 인한 관리 소홀' 같은 문장으로. "…미안하오.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사과하겠소." "사과로 뭐가 달라지나." 노인의 눈빛은 여전히 단단했다. 바위처럼, 도무지 깨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함이었다. [영주님, 저 어르신은 촌장이십니다. 마을의 결정권자세요.] 유하가 옆에서 작게 알려줬다. [함부로 대드시면 안 됩니다.] "…알겠소." 대들 생각은 원래 없었지만, 굳이 대답했다. 괜히 반박했다가 마을 사람 전원한테 돌 맞기 딱 좋은 분위기였으니까. 촌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마을은 이 협곡 온천 덕분에 겨우 살아왔다. 뜨거운 물로 작물을 키우고, 마른 협곡 이끼로 식량을 대체하며."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설명하는 대목에서만큼은 조금 더 담담해졌다. 마치 수백 번은 반복해서 말해본 사람처럼. "그런데."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온천이 최근 들어 급격히 식고 있다. 물줄기가 좁아지고, 이끼도 절반 이하로 줄었어." "어째서요?" "모른다. 다만 이 겨울을 넘길 식량이 없다는 건 확실하지." 방 안 공기가 무거워졌다. 뿔 달린 아이 하나가 어른 옷자락을 꽉 붙잡는 게 보였다. 그 작은 손이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옷자락 색이 살짝 달라 보일 정도였다. "이대로면 이번 겨울에 절반 가까이 죽는다." 촌장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그런데도 인간 영주가 뭘 도와줄 수 있지? 글도 모르고, 이 땅도 모르는 인간이." 뭔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로 아는 게 없었다. 전쟁이라면 어디를 지키고 어디를 뚫어야 하는지 눈에 보였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싸움이었다. 적이 사람이 아니라 겨울이고, 무기가 검이 아니라 이끼밭이라니. 이런 전장은 배운 적이 없다. "…그럼 시험해 보시오." 입에서 저절로 이 말이 나갔다. 다들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의 온도가 조금 전보다 더 차가워진 느낌이었다. "뭘 시험한다는 거지?" 촌장이 물었다. "내가 도움이 되는 사람인지, 아닌지. 뭔가 조건이 있다면 걸어보시오." 촌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유하를 돌아봤다. [촌장님, 저도 그게 낫다고 봅니다. 말로만 하는 사과는 아무 의미 없으니까요.] 유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이 자리의 무게를 더 실감나게 했다. 촌장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사흘 뒤, 협곡 서쪽 골짜기에 매년 이맘때 늑대 무리가 내려온다. 온천 근처 이끼밭을 지키는 게 우리 전통이다. 그 무리를 막아내면 영주로 인정하마." "늑대라면 몇 마리요?" "작년엔 스무 마리쯤이었지." "마을 전체가 상대해도 힘든 숫자인데, 그걸 나 혼자?" "혼자든 아니든 그건 네 사정이지." 촌장의 눈빛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든 실패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아니, 이건 시험이 아니라 그냥 사망 선고 아닌가. 스무 마리를 혼자서 어떻게, 라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웅성거림이 일었다. "저 인간, 죽으려고 온 건가." "그러게, 스무 마리를 혼자서." "어차피 도망칠 인간이었어." 누군가는 아예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좋소. 하겠소." "진심인가?" 유하가 옆에서 눈을 크게 떴다.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에서 순수한 놀람을 봤다. 평소 담담하던 얼굴에 살짝 균열이 간 것처럼,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내가 유일하게 자신 있는 게 이런 거요." 검을 든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오랜만에 명확한 목표가 생긴 기분이었다. 전쟁터에서는 늘 이런 식이었다. 숫자를 세고, 지형을 읽고, 어디서 막고 어디서 몰아야 할지 그리는 것. 그게 유일하게 남은 재능이라면, 지금 써야 할 때였다. 촌장은 잠시 나를 쏘아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흘 뒤 정오, 서쪽 골짜기다. 그전에 도망치면 잿골에서 쫓아내겠다." "안 도망칠 거요." "그럼 됐다." 그 말을 끝으로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화로 불빛만이 남아 나와 유하를 비췄다. --- 그날 밤, 마을 외곽에 마련된 작은 오두막에 배정받았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지어진 오두막이었는데, 벽 틈으로 바람이 술술 들어왔다. 유하가 육포와 물을 가져다줬다. 육포는 어딘지 낯선 향이 났다. 협곡 이끼로 절인 건가 싶었다. "진짜 할 수 있는 겁니까?" "모르겠소. 근데 전쟁터에서 배운 게 하나 있소." "뭡니까?" "숫자가 아니라 지형이 승패를 정한다는 것." 유하는 잠시 나를 빤히 보다가 픽 웃었다. "이상한 인간이네요." "…그거 벌써 두 번째 듣는 말인데." "세 번째 들을 준비도 해두세요."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되오?" "뭡니까." "당신은 왜 나를 데려왔소? 마을 사람들 반응 보면 그쪽도 편치 않았을 텐데." 유하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불빛도 없는 오두막 안에서, 그녀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냥, 누군가는 이 마을을 살릴 방법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영주라는 자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뭐라도 해줬으면 해서.] 그 말은 존댓말이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기대라는 게 이렇게 무거운 거였나. 그녀가 나가고 나서 나는 오두막 창밖으로 협곡 지형을 살폈다. 좁은 골짜기, 뜨거운 온천,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좁은 물줄기. 전장에서 봤던 수많은 지형들이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협곡 폭이 좁아지는 지점, 물살이 세지는 굽이, 바람이 몰아치는 방향까지. 전부 머릿속에서 지도처럼 그려졌다. 스무 마리 늑대라면, 정면으로 막을 게 아니라 지형으로 몰아넣어야 했다. 좁은 골짜기 입구를 미끄러운 돌바닥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면, 늑대들의 속도를 죽일 수 있다. 거기서 온천물을 살짝 끌어와 흐르게 하면, 발밑이 젖어 균형을 잃기 쉬워진다. 그렇게 몰아넣은 뒤 좁은 길목 하나만 지키면, 스무 마리든 서른 마리든 한 번에 상대할 필요가 없어진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되겠는데.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잠을 설쳤지만, 그 이유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감각이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것, 그리고 그게 통할지 안 통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것. 사흘 뒤, 나는 이 마을의 진짜 영주가 될 수 있을지, 혹은 완전히 신뢰를 잃을지, 둘 중 하나였다. 창밖으로 협곡 너머 붉은 하늘이 조금씩 밝아오고 있었다. 저 하늘 밑에서 스무 마리의 늑대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 늑대보다 더 무서운 건, 이미 실패를 확신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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