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하사받은 영지가 잿더미라니

1화

콰앙! 마지막 공성포가 터지며 흙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나는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서 그 광경을 봤다. 오년이었다. 오년 동안 이 진흙탕에서 사람을 베고, 사람을 살리고, 다시 사람을 베었다. 코끝에는 아직도 화약 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발밑에서는 흙과 살점이 뭉개진 냄새가 올라왔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속이 뒤틀렸다. "장군님! 적군이 퇴각합니다!" 부관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목이 완전히 잠겨서 대답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쫓지 마라. 여기서 끝낸다." 그 말을 듣고 병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나는 함성을 지를 힘도 없었다. 갑옷 안쪽이 온통 피와 땀으로 젖어 있었고, 오른쪽 옆구리는 누가 뜨거운 부젓가락으로 지진 것처럼 아팠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살아있다는 게 이상했다. 병사 하나가 다가와 물을 건넸다. 받아 마시는데 손이 떨려서 반쯤 흘렀다. "장군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오년 만의 승리였다. 근데 이상하게 기쁘지가 않았다. 그냥 끝났다는 사실이, 더는 이 짓을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 위안이 됐을 뿐이다. 부모님은 늘 그러셨다. 힘이 있으면 그 힘을 약한 사람을 위해 써야 한다고. 어릴 적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검을 쥔 지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은 뼈에 새겨진 문장처럼 그 말이 따라다녔다. 그래서 나는 늘 앞장서서 싸웠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대선국의 방패'라고 불렀다. 방패라는 말, 나쁘지 않았다. 근데 방패는 원래 제일 먼저 부서지는 물건 아닌가. 정작 내 몸을 지켜줄 사람은 없었다. 전장 어디에도, 그 흔한 야전 막사 안에도. --- 승전보가 왕궁까지 전해지는 데는 보름이 걸렸다. 그 보름 동안 나는 부상병들을 돌보고, 죽은 병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었다. 글씨는 삐뚤빼뚤했지만 이름 정도는 쓸 줄 알았다. 서책은 못 읽어도 사람 이름은 읽고 쓸 수 있었으니까. 대선왕은 나를 친히 알현실로 불러 검을 하사하겠다고 했다. 으리으리한 옥좌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나는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검은 이미 두 자루나 있는데. 게다가 이번에 부러진 것까지 합치면 세 자루째다. "한도윤 장군." 대선왕의 목소리는 낮고 위엄이 있었다. "그대의 공을 어찌 갚아야 할지 오래 고민했소." "소신은 그저 소신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했을 뿐이옵니다." 입에서는 이런 소리가 나갔지만 속으로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검 말고 뭘 주려나. 땅이면 좋겠는데. 아니면 그냥 돈으로 주는 것도 괜찮고. 대선왕이 손을 들자 시종이 두루마리를 펼쳤다. 비단에 금박으로 테를 두른 두루마리였는데, 그 화려함에 잠깐 눈이 팔렸다. "잿골 영지를 그대에게 하사하겠소. 그곳의 영주로 임명하니, 백성을 잘 다스리시오." 영지라니.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장이 아니라 내 손으로 뭔가를 지키는 자리라니, 부모님이 원했던 삶에 조금은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표정은 관리하기 힘들었다.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고 해서 억지로 눌러 참았다. 알현실 안이 조용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실실 웃는 소리라도 났을 거다. [잿골은 대선국 북방 끝, 화산재가 쌓여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입니다.] 귓가에서 재상의 나지막한 설명이 들렸지만 나는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황무지가 뭔지는 알았다. 근데 그게 '영지'로서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농사를 못 지으면 뭐, 딴 걸로 먹고살면 되는 거 아닌가. 무식이 죄라면 나는 이미 사형수였다. 알현이 끝나고 나오는 길, 시종 하나가 슬쩍 다가와 종이 뭉치를 건넸다. "영지 인수 절차입니다. 세금 대장, 인구 명부, 경계 지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맙네." 받아 들고 보니 무게가 제법 나갔다. 이걸 다 언제 읽나. 아니, 애초에 읽을 줄도 모르는데. --- "자네, 정말 그 땅을 받을 셈인가?" 알현실을 나오는 길에 오래 함께 싸운 동료 하나가 나를 붙잡았다. 얼굴에 흉터가 깊게 팬 사내였다. 나랑 같이 삼년 전 남부 전선에서 죽을 뻔했던 놈이다. "거긴 아무것도 없어. 화산이 터진 뒤로 이십 년째 버려진 땅이야." "그럼 더 잘됐군. 내가 채우면 되니까." 동료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자네는 전장에서는 명장이지만…" "알아, 알아. 영주는 처음이라는 거지." "아니, 자네는 글도 제대로 못 읽잖아." ···그건 좀 아픈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검을 쥐었을 뿐, 서책은 손에 잡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농사꾼이었고 어머니는 바느질로 먹고살았다. 집에 책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자네가 대신 읽어주든가." "난 왕궁 근위대에 남기로 했네." "치사한 놈." "자네가 무모한 거지."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웃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을 읽는 건 자신 있었다. 사람이 뭘 원하는지, 뭘 두려워하는지, 그 정도는 눈빛만 봐도 안다. 그거면 될 거라고, 그때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 짐을 꾸리는 데는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원래 가진 게 별로 없었으니까. 검 세 자루, 갑옷 한 벌, 그리고 부모님이 남긴 낡은 목걸이 하나. 그게 내 전 재산이었다. 전장에서 오년, 그전에도 십오년을 검만 쥐고 산 사람의 짐이 이 정도라니, 생각해보면 좀 서글프기도 했다. "영지 서류는 잘 챙기셨습니까?" 부관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서류라니, 그런 게 있었나. 분명 받았는데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안 났다. 허둥지둥 서랍을 뒤져 겨우 봉인된 종이 한 뭉치를 찾아냈다. 펼쳐보니 글자가 빽빽했다. 줄도 안 맞고 그냥 빼곡하게 들어찬 글씨들이 마치 벌레떼처럼 보였다. 하나도 읽을 수가 없었다. "장군님, 그거 세금 규정입니다." 부관이 옆에서 슬쩍 알려줬다. "…그럼 이건?" "인구 명부고요." "이건?" "경계 지도입니다." 셋 다 나한텐 그냥 똑같이 생긴 종이 뭉치였다. "…읽어줄 사람이라도 데려가야겠군." "저는 왕궁 소속이라 못 갑니다." "그럼 누가 가나." "영주님이 직접 사람을 구하셔야죠." ···망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갈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동료도 안 가고, 부관도 안 가고,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을 덜컥 데려가기엔 뭘 믿고 데려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결국 혼자 가는 수밖에 없었다. --- 말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는 동안 풍경은 점점 황량해졌다. 처음 이틀은 그래도 푸른 들판이 이어졌다.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도 보이고, 물레방아가 도는 마을도 지났다. 사흘째부터 풍경이 달라졌다. 푸른 들판이 사라지고 잿빛 흙이 펼쳐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불안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전장에서는 두렵지 않았던 감정이었다. 검을 들고 적을 마주할 때는 뭘 해야 하는지 명확했으니까. 베거나, 막거나, 죽거나. 근데 이건 뭘 해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다. 세금은 어떻게 걷는 거고, 백성은 어떻게 다스리는 건지, 그런 건 누구한테 배운 적도 없다. 말발굽 소리만이 잿빛 흙 위에 규칙적으로 울렸다. 또각, 또각, 또각. 바람이 불 때마다 잿가루가 흩날려서 코끝이 매웠다. 하늘도 어딘지 흐릿했다. 화산재가 아직도 남아서 그런 건지, 그냥 원래 이 지역 날씨가 그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검이 아닌 종이 뭉치를 손에 꽉 움켜쥐었다. 글자 하나도 못 읽는 종이 뭉치를, 뭐라도 되는 것처럼 꽉 쥐고 있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멀리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까악, 까악. 그 소리마저 왠지 나를 비웃는 것 같아서, 나는 말없이 고삐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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