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수납 스킬로 빚 갚습니다

3화

빛은 파란색이었다. 파란색, 파란색, 파란색. 시신의 몸 전체를 감싸며 서서히 밝아지던 그 빛은 마치 물속에서 올려다본 수면 같았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파란빛은 점점 강해지더니 시신의 윤곽을 따라 물결처럼 일렁였고, 그 빛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시신 주변의 잡초들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그리고 다음 순간, 시신이 사라졌다. 짐도, 두루마리도, 유리병도, 목걸이도, 그 모든 게 눈앞에서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마치 누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바닥에는 화살촉에서 흘러나온 핏자국만 남아 있었다. 정말 우연일까? 아니, 이건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현상이었다. 사람이, 시체가, 물건이 통째로 눈앞에서 소멸하는 걸 보고도 우연이라고 우길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해야 할 수준이었다. "......뭐야 이거." 나는 뒷걸음질치며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왔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좌르륵 올라왔고, 목덜미의 잔털까지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마법인지, 어떤 원리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나한테서 이 현상이 시작됐다는 것. 시신이 있던 자리와 내가 서 있던 자리 사이의 거리는 채 두 걸음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빛이 처음 발현된 지점은, 정확히 내 손끝에서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손을 뻗어 시신을 확인하려던 그 순간부터 빛이 시작됐으니까. 씨발, 진짜, 나 뭐 됐냐. 조심스레 손을 들어 허공을 향해 뻗어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엔 눈을 감고 방금 그 감각, 서늘하고 부드럽던 그 느낌을 떠올리며 손끝에 집중했다. 손바닥 안쪽에서 뭔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순간 시야에 반투명한 창 하나가 떠올랐다. 【공간수납】 용량: 알 수 없음 보관물: 1건 나는 그 자리에서 입을 딱 벌린 채로 굳어버렸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창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더 선명하게 각인되듯 눈앞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거, 이거 완전 게임 같은데. 예전에 폐인처럼 태블릿으로 밤새 돌려봤던 그 온라인 게임 인터페이스랑 똑같은 모양이었다. 파란 테두리, 반투명한 배경, 그 위에 떠 있는 글자체까지 어디서 본 듯한 느낌. 웹소설에서나 보던 그 시스템 창이 실제로 내 눈앞에 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이런 게 실존한다고? 나 같은 흙수저 인생, 되는 일 하나 없이 살아온 놈한테 이런 게 굴러떨어진다고? "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친놈처럼 낄낄거리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 순간, 이 스킬이 얼마나 중요한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건 그냥 재밌는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이 낯선 세계에서, 아무 배경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나한테, 이 정체불명의 시스템이야말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밧줄이었다. 나는 다시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창 표면을 스치듯 닿는 순간, 목록이 자동으로 펼쳐졌다. 창 안에서 정만수-토끼-라는 이름과 함께, 조끼 하나, 유리병 셋, 두루마리 두 장, 그리고 낡은 양피지 한 장이 나열되어 있었다. 정만수. 토끼. 이 이름이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죽은 그 남자의 것이 확실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이 끊긴 채 화살에 맞아 쓰러져 있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의 목록으로, 데이터 몇 줄로 압축되어 내 눈앞에 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사람 한 명이 죽었는데, 그 죽음이 나한테는 인벤토리 항목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하지만 지금 도덕적 고민을 할 여유는 없었다. 살아야 했다.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손끝으로 두루마리 하나를 골라 꺼내는 상상을 하자, 손안에 진짜로 그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무게감이 있었다. 종이 특유의 바스락거리는 질감도 그대로였다. 환상이 아니었다. 진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건이 손안에 들어와 있었다. "미친, 미친, 완전 미쳤다." 나는 두루마리를 손에 쥔 채로 몸을 떨었다. 심장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흥분 때문이었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그 흥분의 연장선이었다. 한 번 더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유리병 하나를 꺼내볼까. 아니면 조끼를. 손을 뻗어 목록 중 유리병을 향해 의식을 집중하자, 역시나 손안에 작은 유리병 하나가 나타났다. 안에는 붉은빛을 띤 액체가 반쯤 채워져 있었는데, 흔들자 걸쭉하게 움직이는 게 물이나 술 같은 종류는 아닌 듯했다. 포션인가? 진짜로 이런 게 존재한다고? 절망 속에서 죽음을 목격한 지 십 분도 안 됐는데, 그 죽음이 남긴 것을 통해 나는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은 셈이었다. 아이러니했다. 누군가의 끝이 나한테는 시작점이 되어버렸다는 게. 불운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녔지만, 이번만큼은 그 불운의 끝자락에 이상한 보상이 달려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목록을 살펴봤다. 낡은 양피지 한 장. 저건 뭘까. 두루마리와는 또 다른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는 걸 보면 용도가 다른 물건일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당장 꺼내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조금 전 들려온 소리들, 화살이 날아오던 그 방향에서 아직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불안감이 발목을 잡았다. 일단은 여기까지만. 나는 방금 꺼낸 두루마리와 유리병을 다시 【공간수납】에 밀어 넣었다. 손안에서 물건들이 스르륵 사라지는 감각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것 같기도 했다. 보관물 항목이 다시 1건으로 줄어드는 걸 확인하고서야 나는 겨우 숨을 돌렸다. 그때였다. "거기 서! 잡아!" 멀리서 남자들의 거친 외침이 숲을 갈랐다. 내 심장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까지 흥분과 안도 사이를 오가던 감정이 순식간에 경계와 긴장으로 뒤바뀌었다. 곧이어 낙엽을 밟는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세 명,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나무 뒤에 웅크린 채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살피는데, 좁은 길목으로 한 소녀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짧은 갈색 머리를 흩날리며 허리에 단검을 찬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이마와 목덜미에는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고, 옷자락 여기저기가 찢어진 채로 흙과 나뭇잎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얼마나 절박하게 도망쳐온 건지 그 몰골만 봐도 짐작이 됐다. 소녀의 뒤로는 세 명의 남자가 험상궂은 얼굴로 쫓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손도끼를 든 채 낮게 웃고 있었다. 나머지 둘은 각각 곤봉과 짧은 창을 들고 있었고, 세 명 모두 걸음걸이가 익숙했다. 사냥, 아니 사람을 사냥하는 데 익숙한 걸음걸이였다. "놓쳤다고 좋아하지 마라!" 도끼를 든 남자가 소리쳤다. 목소리에서 짜증과 흥분이 뒤섞인 게 느껴졌다. 마치 오랜만에 재미있는 놀이감을 찾은 사람처럼, 입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뒤질 때까지 쫓아가!" 곤봉을 든 남자가 뒤이어 외쳤다. 소녀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눈으로 잠시 멈춰서더니, 곧 이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려왔다. 그 순간 소녀의 눈에서 나는 뭔가를 읽었다. 절박함, 그리고 마지막 도박을 걸어보는 사람의 눈빛. "저기, 도와줘!" 소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조금 전까지 시스템 창을 열어놓고 흥분에 취해 있던 나였는데, 갑자기 눈앞에 낯선 소녀와 살기 어린 무장한 남자들이 등장하니 뇌가 상황을 처리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도와달라니, 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하나도 모르는 판인데. 도끼 든 저 새끼는 또 뭐고, 왜 저렇게 쫓기고 있는 건지 설명도 안 해주고 무작정 도와달라고 하면 나는 뭘 어쩌라는 건가. 하지만 소녀의 발은 이미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뒤쫓는 남자들의 발소리는 점점 더 크고 선명해지고 있었다. 나는 아직 몰랐다. 이 소녀와의 만남이, 방금 얻은 이 이상한 스킬을 검증하고 확신하게 되는 계기가 될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저 도끼를 든 남자들이 앞으로 내 목숨을 몇 번이나 위협할 존재라는 사실도.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