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로맨스, 제가 막겠습니다

4화

복도 창문으로 노을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붉은 빛이 대리석 바닥에 길게 늘어지면서, 마치 핏자국처럼 번져 보였다. 타이밍도 참 절묘하다. 방금 여주인공을 안아 올린 씬을 찍었으니 배경도 로맨스 필터를 씌워줘야 하나 보다. 이헌은 목소리를 더 낮췄다. "자세히 얘기할 곳이 아니다. 따라와." 그의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딱 남들 눈에 안 띌 정도의 속도. 왕세자가 도망치듯 걷는 모습이 웃기면서도, 저 등짝에서 풍기는 압박감은 진짜였다. 그가 안내한 곳은 학원 뒤편의 오래된 정원이었다. 인적이 드물었고, 낡은 벤치 하나만 놓여 있었다. 담쟁이가 벤치 등받이를 반쯤 뒤덮고 있었고, 흙바닥에는 누군가 밟고 지나간 발자국 몇 개만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관리가 안 되는 건지, 원래 이렇게 방치된 곳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라면 마법 감청도 안 닿는다." "왕세자가 그런 것까지 확인하고 다닙니까?" "확인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이헌이 벤치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 로맨스 게임 남주 같던 얼굴에, 이제는 지친 관료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눈 밑에 옅은 그늘이 있었고, 어깨는 미묘하게 처져 있었다. 저것도 CG 리소스로 만들었으면 '피로도 스탠딩 일러스트'라는 이름이 붙었을 표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지. 이 세계는 어떤 정해진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그 흐름에서 벗어나면, 세상 자체가 무너진다." "무너진다는 게 구체적으로 뭡니까." "마력장 붕괴. 던전 게이트 폭증. 왕국 전역에 몬스터가 쏟아지는 사태." [아, 이거 게임 후반부 진엔딩 조건이랑 똑같은데요. 특정 이벤트들을 다 놓치면 세계 멸망 루트로 가는 거예요.] 속으로 그 정보가 떠오르는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 세계는 정말로 『반짝반짝 학원 파라다이스』다. 그리고 그 게임의 진엔딩 조건은, 정해진 로맨스 이벤트들을 순서대로 완수하는 것이었다. 첫 만남, 첫 스캔들, 첫 위기, 그리고 구원. 정해진 순서대로 카드를 넘겨야만 해피엔딩이 뜨는 그런 구조였다. 나는 그 구조를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클리어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지금 이건 클리어가 아니라 생존이라는 거였다. "당신도 알고 있었던 겁니까." "…어느 정도는. 정확히는 아리가 먼저 알아냈지." "윤아리 영애가." "그래. 그녀는 처음부터 이 세계를 어떤…… 이야기의 일부처럼 인지하고 있었다. 정확히 뭔지는 나도 몰라. 다만 특정 사건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더군." 윤아리도 게임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플레이어였던 거네요. 저처럼.] 너랑은 다르지, 너는 그냥 내 머릿속 잡음이잖아. 머릿속 잡음이 이렇게 정보력이 좋아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럼 오늘 아리 영애가 쓰러진 것도." "원래대로면 내가 그녀를 안아 올렸어야 했다. 그게 '이야기'가 정해 둔 흐름이었어. 그런데 당신이 먼저 개입했지." 이헌의 목소리에 원망이 살짝 섞여 있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모르겠다. 아직 세상이 무너지진 않았으니까. 다만 흐름이 어긋난 부분들이 조금씩 쌓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말이 그럴싸했다. 근데 그 말을 하는 왕세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까 아리를 안아 올렸을 때보다 지금이 더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세계선 안정도: 89.3%. 이상 편차 감지: 1건.】 갑자기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처음 보는 종류였다. 이런 게이지가 있는 줄도 몰랐다. 지금까지 본 알림은 스킬 습득, 호감도 상승, 이벤트 발생 정도였다. 근데 이건 아예 세계 전체를 계기판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게임 시작 화면 구석에 있는 서버 상태창 같은 느낌이었는데, 문제는 이게 서버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거였다. [어, 이건 저도 처음 보는 알림이에요. 이 세계 진짜 시스템이 있나 봐요.] 너도 모르는 게 있냐. "이 숫자가 보이십니까?" "…숫자? 무슨 소리야." 이헌은 못 본다는 뜻이었다. 이 알림은 나에게만 뜨는 모양이었다. [아마 전생 기억이 각성한 사람한테만 보이는 것 같은데요. 확실치 않지만.] 확실치 않다는 말을 확실하게도 잘하네. 나는 그 89.3%라는 숫자가 마음에 걸렸다. 100%에서 10.7%가 이미 어긋났다는 뜻이다. 하루 만에, 그것도 내가 오자마자 이렇게 됐다는 게 우연일까. 숫자 뒤에 붙은 '이상 편차 감지: 1건'이라는 문구도 신경 쓰였다. 1건. 딱 하나. 그게 오늘 내가 아리를 대신 받아낸 그 순간을 말하는 거라면, 이 세상은 지금 나를 하나의 '버그'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었다. 버그 취급받는 인생, 이번 생에도 계속되는구나. "전하,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이 흐름이 무너지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헌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리 말로는, 다인력 기준으로 반년쯤. 정확한 날짜까진 모른다더군." 반년. 짜장면 시켜 먹고 정신 좀 챙길 시간도 없이 세계 멸망 시계가 돌고 있었다니. 반년이면 계절이 두 번 바뀌는 정도의 시간이다.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거두는 것도 아니고, 세계가 무너지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채로 학원 생활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등록금은 냈나 모르겠다. [짜장면은 여기 없어요.] 알아, 은유였다고. [그리고 이 세계에는 계절이 세 개예요. 우기, 건기, 그리고 마력 폭풍기.] 물어본 적 없는데 대답하는 그 습관 좀 고쳐줬으면 좋겠다. 그때 정원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딱 권위가 있는 사람만 낼 수 있는 그런 걸음이었다. 학장이었다. "두 분이 여기 계실 줄은 몰랐군요." 이헌과 나는 동시에 자세를 바로 했다. 방금 나눈 대화가 얼마나 들렸을지 가늠이 안 됐다. 이 정원이 마법 감청이 안 닿는다는 건 이헌의 확인이었지, 학장의 청력까지 계산에 넣은 건 아니었을 텐데. 학장의 시선이 벤치와 나, 그리고 이헌 사이를 천천히 오갔다.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지만, 그 온화함 밑에 뭔가를 계산하는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한서준 님." 학장의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무게가 실려 있었다. "조사 결과를 검토했습니다. 결론은, 겸임교사 임명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예상보다 빠른 결정이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서류 심사조차 통과할지 의문이었는데, 이렇게 속전속결로 결정이 나다니. 뭔가 이상하게 순조롭다 싶으면 다음 문장이 항상 발목을 잡았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나올 때마다 항상 좋은 적이 없었죠.] 너도 학습이 되는 모양이다. "말씀하십시오." "내일 오전, 전 교두단이 참관하는 자리에서 실력 평가를 받으셔야 합니다. 마법전투학 교사로서 학생들 앞에 서기 전에, 최소한의 검증 절차는 필요하니까요." "검증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입니까." 학장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걸렸다. 온화해 보이는 미소였지만 왠지 등골이 서늘했다. 마치 다음 대사를 이미 몇 번이나 연습해 온 사람처럼, 억양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실전 형식입니다. 학원 소속 3급 이상 마법기사 다섯 명과 동시에 대전하시게 될 겁니다." 다섯 명. 동시에. 내 귀가 잘못 들은 게 아니길 바랐지만, 학장의 표정을 보니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이헌도 옆에서 헛기침을 했다. 저 헛기침의 의미는 딱 하나였다. '저기, 그거 좀 심한 거 아닙니까' 라는 무언의 항변. 그런데 정작 학장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교사 임용 시험이 왜 이렇게 살벌해요.] 나도 그게 알고 싶다. 머릿속으로 3급 마법기사가 얼마나 강한지 떠올려보려 했지만, 애초에 이 세계 등급 체계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게임 지식으로 유추해보면 그럭저럭 상급 몹 다섯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는 수준이라는 것 정도만 짐작이 갔다. 몹 다섯 마리를 동시에. 튜토리얼도 안 끝난 캐릭터한테 이런 난이도를 던지는 게 정상인가. 노을은 어느새 다 저물어가고 있었다. 정원의 그늘이 짙어지면서, 학장의 미소만 유독 밝게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일 오전. 전 교두단이 참관하는 자리. 다섯 명 동시 대전. 머릿속에서 세 문장이 겹쳐 울렸고, 나는 그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벌써 위장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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