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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 사건 이후로, 설하늬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저 나를 훈련시키는 감독관,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이었는데—뭐, 다섯 살짜리한테 그 이상의 감정을 기대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이제는 뭔가 확인해야 할 게 생긴 사람처럼, 밥을 먹을 때도, 마당에서 걷는 걸 볼 때도, 심지어 내가 그냥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을 때조차 시선이 따라붙었다. 처음에는 그냥 기분 탓인가 싶었는데, 며칠이 지나도 그 시선이 사라지지 않아서 슬슬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었지만, 곱씹어보면 그날 이후로 뭔가 달라진 건 확실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나도 헷갈리지만, 아마 내가 무심코 마력을 흘렸던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택 지하 창고로 끌려갔다. 정확히는 '끌려갔다'는 표현이 맞았다. 이수현이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고, 설하늬가 뒤에서 내 손을 잡고 따라왔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오래된 목재라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고, 공기는 습하고 먼지 냄새가 진하게 났다. 창고 안은 어둡고 좁았는데, 낡은 나무 상자들이 벽을 따라 쌓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천 뭉치와 부서진 무기 파편들이 뒤섞여 있었다. 전쟁 유물 창고라고 하기엔 관리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 '이거 그냥 잡동사니 창고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지만, 이수현이 그 잡동사니 사이에서 정확히 하나의 상자를 골라내는 걸 보고 그 생각을 접었다. 저 사람은 이 창고 안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수현이 꺼낸 상자는 다른 상자들보다 유독 낡아 보였는데, 뚜껑을 열자 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수정구가 나왔다. 색은 짙은 남색에 가까웠고, 표면에는 미세한 균열이 이미 그물처럼 퍼져 있어서, 딱 봐도 오래된 물건이라는 게 느껴졌다. "이건 신전에서 쓰는 정식 감정구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마력의 등급을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는 물건이야." 이수현이 상자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설명했다. "전쟁 때 노획한 마족의 유물인데, 지금까지 창고에 처박아둔 걸 이제야 꺼냈어." "그런 위험한 걸 왜 이제 와서..." 설하늬가 눈살을 찌푸리며 상자와 이수현을 번갈아 보았다. 목소리에는 못마땅함이 섞여 있었는데, 딱 봐도 이 물건이 안전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확인해야 하니까." 이수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손끝으로 수정구의 표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저 아이가 대체 어느 정도의 그릇인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봐야 앞으로의 계획을 세울 수 있어." 그 말에 설하늬는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자기도 궁금한 거다. 나 역시 궁금하긴 했다. 다만 그 궁금증이 좋은 쪽으로 흘러갈지 나쁜 쪽으로 흘러갈지 감이 안 잡혔을 뿐이었다. 나는 그 수정구를 손에 쥐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거 완전 게임 속 감정 아이템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전생의 게임에서 이런 걸 보면 항상 다음 컷씬에서 뭔가 폭발하거나 주인공이 각성하거나 그런 거였는데, 설마 나도— 나는 순순히 그것을 받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수정구는 처음에는 은은한 푸른빛을 뿜어냈고, 그 빛이 손바닥 위로 부드럽게 번져나가면서 묘하게 따뜻한 감각을 남겼다. 딱 그 정도였으면 좋았을 텐데. 빛이 서서히 강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은은한 정도였던 것이, 몇 초가 지나자 방 안 전체를 밝힐 정도로 강해졌고, 나는 손바닥 위에서 그 빛이 점점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슬며시 불안해졌다. '이거 원래 이래야 하는 거 맞나' 싶었지만, 옆에서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없이 지켜만 보고 있어서, 나 혼자 손을 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력 등급 측정 중...] 그 문구가 떠오른 순간, 방 안의 세 사람 모두 숨을 죽이고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손끝이 저릿한 감각을 느끼며 그 빛을 지켜보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빛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렬해져만 갔다. 처음의 푸른빛은 어느새 백색에 가깝게 변해 있었고, 그 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던 설하늬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파직... 파지지직... 수정구 표면에 있던 균열이 그 소리와 함께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얇은 얼음판이 무게를 견디다 못해 갈라지는 것처럼,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이 방 안 벽면에 어지럽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결국 수정구는 견디지 못하고 손바닥 위에서 그대로 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균열이 더 깊게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놀라서 손을 떼려 했지만, 이수현이 다급히 외쳤다. "멈추지 마! 마지막까지 봐야 해!" 그 목소리가 하도 다급해서,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그대로 유지했다. 손바닥이 뜨겁다 못해 이제는 아릴 지경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통증보다 이 상황을 끝까지 봐야 한다는 묘한 압박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측정 한계 초과] [감정구의 내구도가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등급: SSS+ (역대 최고 기록 초과) 그 문구가 뜬 것과 동시에, 수정구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파그작!! 방 안에 유리 파편이 흩날렸고, 나는 그 순간 손끝이 아릴 정도의 통증을 느꼈다. 파편 몇 조각이 손등에 튀어서 작은 상처가 났는데, 정작 신경 쓰이는 건 그 통증이 아니라 방금 눈앞에 떠올랐던 문구였다. 'SSS+라니. 이게, 등급이 있긴 있는 거였네...'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그 등급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로서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게임이었다면 최소 몇 시간짜리 튜토리얼 보스급 등급이었겠지만, 여긴 게임이 아니었다. 그러니 저 등급표가 실제로 뭘 뜻하는지는, 옆에 있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유추하는 수밖에 없었다. 설하늬가 파편들 사이에서 나를 끌어당겨 상처를 확인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게 놀라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유물은 마족 대장군급 이상을 감정할 때 쓰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다. "그런 물건이... 다섯 살짜리 아이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고요?" 이수현의 얼굴에는 놀라움을 넘어선 어떤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서진 파편 하나를 손끝으로 집어 들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 아이는 이미 왕국이 가진 어떤 등급표로도 잴 수 없는 존재야."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낮게 이어 말했다. "청람 왕국 역사상, 남성이 스스로 마력을 다뤘다는 기록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런데 지금, 그 남성이 마족의 유물조차 부숴버리는 등급을 보여줬다는 거지. 이건 단순한 재능이 아니라, 왕국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할 사건이야."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갈라진 유리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다섯 살짜리 손바닥에 남은 작은 상처에서 피가 몇 방울 배어나오고 있었는데, 그 통증이 오히려 이 모든 상황이 현실이라는 걸 실감하게 해주었다. 꿈이었으면 이 정도로 아프진 않았을 테니까. '세계 최초라니, 이거 축하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도망쳐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 힘을 가진 채로는, 나는 절대 평범한 남작가의 아들로 조용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뭔가 대단한 걸 얻었다는 성취감보다는, 앞으로 이 힘 때문에 얼마나 많은 귀찮은 일에 휘말릴지에 대한 걱정이 훨씬 컸다. 다섯 살짜리한테 이런 걱정을 시키는 세계관, 정말 너무하지 않나. 이수현은 그날 밤, 이 사실을 절대 외부에 알리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저녁 식사도 거른 채, 촛불 하나만 켜놓은 서재에 우리 셋을 모아놓고 그녀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건 우리 셋만 아는 일이야. 만약 이게 밖으로 새어나가면..." 그녀가 말을 흐렸는데, 그 뒷말을 굳이 잇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왕국의 판도를 뒤흔들 만한 존재가 몰락한 남작가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것이라는 걸. 설하늬도 그 말에 별다른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평소 감정 표현에 인색한 그녀치고는 표정이 유독 굳어 있었다. "당분간은 훈련 강도를 낮추겠습니다." 설하늬가 덧붙였다. "그리고 외부인의 출입도 더 철저히 통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이수현이 짧게 답했다.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낮에 있었던 일을 곱씹으며, 이제 내 인생이 정말로 평범한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걸 새삼 실감했다. 다섯 살에 세계 최초 타이틀을 딴다는 게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일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날의 결심이 얼마나 순진했는지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부서진 수정구, 그 유물에는 원래 소유주였던 마족 조직과 이어진 낡은 계약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것이 파괴되는 순간 미약한 마력의 파장이 아주 먼 곳까지 퍼져나갔다는 사실을, 이수현도 설하늬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 셋이 그날 밤 창고 문을 조용히 걸어 잠그고, 이 일을 완벽한 비밀로 묻었다고 믿었을 무렵—어딘가에서는 이미 다른 눈이 뜨이고 있었다는 걸, 그때는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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