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성하, 저 사실 남자예요

2화

여자를 마을 외곽의 은신처에 눕히고 나서야 나는 겨우 숨을 돌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생각해보니 여자를 업고 여기까지 뛰어온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운동 좀 해야겠다.' 정수 마법사라고 몸이 저절로 튼튼해지는 건 아니었다. [의뢰 완료: 습격 저지] [보상 없음] 보상이 없다니, 이 시스템 진짜 짠돌이다. 퀘스트 창을 몇 번이나 눌러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경험치 한 톨도 없어? 아르바이트도 이 정도로 안 짠데.' 나는 허공에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시스템은 원래 그런 걸로 항의를 받아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여자가 힘없이 웃었다. 입술이 하얗게 떠 있었다. 배를 감싸안은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냥 지나가다 본 거예요." 나는 손을 저으며 최대한 가볍게 말했다. '거짓말이다. 사실 이 근처에서 관련 정보를 캐던 중이었다.' 관이 사라진 지 벌써 여러 달째다. 카이렌 교단이 신성 유물로 떠받들던 그 관들 중 몇 개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고, 이상하게도 교단은 그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었다. 관리 명부에서 이름을 지운다거나, 목격자를 조용히 이주시킨다거나, 그런 식으로. 숨기는 이유가 있다는 건, 뭔가 구린 게 있다는 뜻이다. 5년 전 카이렌을 잡을 때는 세상 사람 절반이 다 알아주는 대사건이었는데, 지금 이건 나 혼자 은밀하게 파고 있는 작은 균열이다. 뉴스에도 안 나오고, 협회 게시판에도 안 뜨고, 그냥 나 혼자 수첩에 끄적이는 낙서 같은 사건. 외로운 작업이었다. 원래는 강철웅과 함께였는데, 몇 달 전 각자 다른 단서를 쫓기로 하면서 갈라섰다. 그때는 그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둘이 붙어 다니면 눈에 띄고, 각자 흩어지면 정보가 두 배로 모인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 근데 밤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그 넓은 등짝이 슬쩍 생각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보고 싶다는 소리는 절대 안 할 거다.' 나는 그렇게 결심했지만, 밤마다 그 큰 등짝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혼자 자는 텐트가 이렇게 넓게 느껴질 일인가. 여자가 잠든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설이를 불렀다. "아까 그거, 위험했지?" 내가 조용히 물었다. 서늘한 기운이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설이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 대신 온도로 대답한다. 차가우면 부정, 더 차가우면 강한 동의. 지금은 뼛속까지 시렸다. "그럼 방법을 찾아야겠네." 나는 중얼거렸다. [힌트: 잠재 인격 봉인 해제 조건 미충족] 잠재 인격이라니,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사 등록 자체를 한 적이 없어서, 나에 대한 정보는 시스템도 절반쯤 모르는 것 같았다. 애초에 세상 사람들은 백하람이라는 이름조차 모른다. 다들 아는 건 '백설공주'라는 별명 하나. 5년 전 그 전투에서 얼굴을 가리고 싸웠던 탓에, 나는 실력은 최상급인데 존재 자체는 도시전설 취급을 받고 있었다. 가끔 술집에서 내 얘기를 안주 삼아 떠드는 사람들 옆에 앉아서 듣고 있으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 백설공주가 지금 당신 옆에서 맥주 마시고 있다니까요.' 물론 말은 안 한다. 뭐, 편할 때도 있으니 나쁘지 않다. 스승도 없이 혼자 파고든 정수 마법인 만큼, 나는 시스템 창을 하나하나 눌러가며 정보를 헤집었다. [정수 마법: 감정 동조형 - 사용자의 심리 상태가 결과물의 형태와 위력에 직결됨] [주의: 감정 과부하 시 형태 붕괴, 광역 폭주 발생 가능] 간단히 말해서, 화나면 아무것도 못 조준한다는 뜻이었다. '프로게이머가 흥분하면 조작 실수하는 거랑 똑같잖아.'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한데, 어쨌든 그런 느낌이었다. 화나면 손이 떨리고, 손이 떨리면 조준이 어긋나고, 조준이 어긋나면 아군까지 휩쓸린다. 그야말로 최악의 컨트롤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 아주 작게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특이 조건 감지: 감정 붕괴 직전, 인격 재구성 가능성 확인] 인격 재구성?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읽을수록 이상한 소리였다. [해당 인격은 극도의 냉정함과 전투 효율을 유지하나, 발현 조건이 불명확함] 불명확하다는 게 제일 무섭다. 마치 '가끔 되는데 언제 되는지는 모름'이라는 소리 아닌가. 이런 식으로 설명 창을 던져놓고 발현 조건은 안 알려주는 게 이 시스템의 특기였다. '그럼 나보고 몸으로 부딪혀서 알아내라는 거냐.' 하지만 며칠 뒤, 나는 그 조건을 우연히 알게 됐다. 숲 근처 폐허에서 정화대 잔당 여섯 명과 마주쳤을 때였다. 놈들은 도망친 여자를 다시 찾으러 온 게 분명했다. 발걸음 소리부터 심상치 않았다. 여섯 명이 한꺼번에 부츠를 신고 낙엽을 밟는 소리는, 평범한 순찰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거기 서라, 이단자!" 대장인 듯한 놈이 검을 뽑았다. 칼날에서 성수 특유의 은은한 광채가 번뜩였다. 나는 여자를 등지고 섰다. '또 감정이 올라오면 어떡하지.' 여섯 명, 게다가 뒤에는 방금 구해낸 임산부까지. 솔직히 이 조합은 초조해지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걱정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세상이 느릿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속도조차 느긋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특이 인격 발현: 잠정 명칭 - 냉전(冷戰)] [지속 시간: 전투 종료까지] [효과: 감정 지수 강제 고정, 판단력 300% 상승] 오, 이런 것도 있었네.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근데 웃는 표정이 평소보다 훨씬 서늘했던 모양이다. 놈들이 눈에 띄게 굳었으니까. "뭐, 뭐야 저 표정..." 대장이 뒷걸음질 쳤다. 칼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무서우면 오지를 말지.' 나는 손끝에 정수를 모았다. 이번엔 뜨겁지 않았다. 차갑고, 정확하고, 무자비했다. 평소의 정수는 마음이 끓는 대로 요동치는 불꽃 같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재질처럼 느껴졌다. 날카롭게 벼려진 얼음 조각. 슈각! 슈각! 슈각! 세 번의 손짓으로 세 놈이 동시에 쓰러졌다.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남은 세 놈은 뒤도 안 보고 도망쳤다. 부츠 소리가 순찰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빨라졌다. [전투 종료] [잠정 인격 '냉전' 해제] 다시 세상이 원래 속도로 돌아왔다. 손끝이 살짝 저릿했다. 방금까지 얼음처럼 차가웠던 몸에 다시 열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이게 히든카드구나.' 감정이 극한까지 몰릴 때, 폭주 대신 냉정하고 포악한 다른 인격이 튀어나오는 거였다. 조건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완전히 무방비 상태는 아니라는 뜻이다. 나쁘지 않은 보험이었다. 나는 여자를 돌아보며 웃었다. "자, 이제 좀 안전하실 겁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여자는 여전히 겁먹은 표정으로 배를 감싸고 있었다. 방금 본 게 사람인지 뭔지 헷갈리는 눈치였다. "교단은... 왜 저를 쫓는 걸까요..." 여자가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거, 저도 알아내야 할 것 같네요." 나는 낮게 대답했다. 남은 관을 되찾는 것. 교단의 진짜 얼굴을 밝혀내는 것. 그 두 가지가 이제 확실한 목표가 됐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려면, 정직하게 정문으로 걸어 들어갈 순 없었다. 숨어 들어가야 했다. 교단 깊숙한 곳까지. 경비도 삼엄하고, 신자들끼리만 통하는 암구호도 있고, 낯선 얼굴은 그 자리에서 걸러진다는 소문도 들었다. '문제는... 이 얼굴이 너무 눈에 띈다는 거지.' 백설공주라는 별명이 이럴 때는 골칫거리였다. 전투 중에는 얼굴을 가리지만, 평상시엔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손거울을 꺼내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하얗고, 곱고, 어디서 봐도 남자로는 안 봐줄 것 같은 그 얼굴. 거울 속의 나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순간 아주 불길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나는 애써 그 생각을 지웠지만, 며칠 뒤 나는 정말로 그 불길한 아이디어를 실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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