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관문 안쪽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는데, 천장이 아득히 높은 원형 홀 구조였고 바닥 곳곳에 낡은 문양들이 빛을 내며 길을 안내하듯 이어져 있었다. 그 빛깔이 은은한 청록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걸을 때마다 문양이 반응하듯 살짝 밝아졌다가 다시 잦아드는 게 마치 이 공간 전체가 우리의 발걸음을 하나하나 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발밑에서 느껴지던 진동은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커졌고, 처음에는 그게 단순한 지반의 울림인가 싶었는데 걸음을 옮길수록 그 진동에 규칙적인 박동이 섞여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 소리 같은, 혹은 거대한 무언가가 숨을 쉬는 소리 같은. 마침내 홀 중앙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그 진동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한 기계 골렘—형태만 보면 낡은 고대 전투병기에 가까웠는데, 그 크기가 청단호의 함재기 한 대와 맞먹을 정도였다. 표면에는 우리가 밖에서 봤던 것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눈처럼 보이는 부위에서 붉은 빛이 서서히 켜지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땐 그냥 잠들어 있는 조형물인가 싶었는데, 그 붉은 빛이 켜지는 순간 알았다. 저건 그냥 조형물이 아니라, 여기까지 온 침입자를 가르는 필터였다.
[알림: 관문 수호자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시험이 시작됩니다.]
"...이건 좀 큰데?"라고 내가 중얼거리자, 도현이 곧바로 무기를 재정비하며 말했다.
"함장님, 물러나실 수 있으면 지금 물러나시는 게—"
"됐어, 이미 시작됐는데 도망갈 데도 없잖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살짝 계산을 돌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 들인 시간, 이 홀의 출구까지 되돌아가는 데 걸릴 시간, 그리고 저 골렘이 그 시간 동안 가만히 있어줄 확률까지. 결론은 뻔했다. 도망은 선택지에 없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렘의 팔이 통째로 휘둘러졌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춰 피했다. 지나간 자리의 바닥이 움푹 파일 정도로 위력이 대단했는데, 만약 저게 그대로 맞았다면 이 고급 신체도 견디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정확히는 '견디지 못한다'가 아니라 '이 몸이 반으로 접힌다'는 표현이 더 맞았을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런 걸 굳이 확인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부우욱!!
골렘의 두 번째 팔이 다시 허공을 갈랐고, 나는 그걸 피하면서 동시에 놈의 관절 부위를 노리고 팔을 뻗었다. 관절이 약점일 거라는 건 딱히 정보가 있어서 판단한 게 아니라, 그냥 인간형이든 뭐든 관절은 원래 약하게 만들어지는 법이라는, 지구에 살 때부터 몸에 익은 상식 하나에 기댄 것뿐이었다.
콰크작!
타격이 정확히 들어갔는데도 골렘은 별다른 손상 없이 그대로 버텨냈고, 나는 그 단단함에 순간적으로 '이거 잘못 골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뚝을 타고 올라오는 반발력이 고급 신체의 관절 안쪽까지 저릿하게 울려서, 순간적으로 손이 그대로 부서진 게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도현이 뒤에서 원거리 사격으로 지원했지만, 그마저도 표면에 흠집만 낼 뿐이었다. 파직, 파직, 하는 소리가 몇 번 이어졌는데, 그 정도로는 이 거대한 몸뚱이 어디에도 흠을 낼 수 없다는 걸 그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함장님, 저 문양이 놈의 핵심 부위인 것 같습니다. 저기를 집중 공격하십시오"라고 도현이 다급하게 외쳤고,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골렘의 가슴 중앙에 새겨진 가장 밝은 문양을 확인했다. 다른 부위의 문양들보다 유독 짙고 선명하게 빛나는 그 문양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누가 봐도 '여기를 부수면 뭔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저기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부위까지 접근하려면 골렘의 두 팔 공격 범위를 뚫고 들어가야 했다. 계산해보니 승률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서 도망칠 방법도 마땅치 않았으니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요컨대 이건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였다. 확률이 낮아도 가야 하는 길이라면, 그건 이미 선택이 아니라 그냥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엄호해!"라고 외치며 나는 정면으로 뛰쳐나갔다.
[경고: 함장 한별-392의 내구도가 55%까지 하락했습니다.]
골렘의 팔이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갔고, 그 순간 내부에서 뭔가 부품이 어긋나는 것 같은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를 악물었다는 표현도 좀 이상한데, 이 몸에 진짜 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기분이었다는 소리다. 도현의 사격이 골렘의 시선을 계속 붙잡아주는 사이, 나는 놈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가슴팍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 시험이라는 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나는 정말 서울에서 트럭에 치인 것도 억울한데 여기서까지 죽는 건가 하는, 그런 쓸데없이 구체적인 걱정들. 하지만 그 생각들도 골렘의 가슴팍이 눈앞에 닥친 순간 전부 날아갔다.
"거기다!!"
주먹을 있는 힘껏 문양에 박아넣었다.
파그작!!!
그 순간 골렘 전체가 얼어붙듯 멈췄고, 몸통 곳곳에서 균열이 번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안쪽에서부터 빛이 터져 나오며 무너져내렸다. 나는 그 폭발의 여파에 뒤로 튕겨 나가면서도, 이상하게 아프다는 느낌보다는 '되네' 하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바닥에 등을 대고 미끄러지듯 밀려나면서도, 시야 한쪽에는 골렘의 몸이 안쪽부터 빛으로 부서져 나가는 광경이 슬로모션처럼 지나갔는데, 그 광경이 이상하게 아름다워서 하마터면 감상에 빠질 뻔했다. 물론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알림: 관문 수호자 격파 완료. 시험 종료.]
[알림: 잠재능력 재평가 프로토콜 완료. 개체 한별-392의 등급이 산출되었습니다.]
그 문구가 뜨는 순간, 나는 숨죽인 채 다음 창을 기다렸다. 등급이라는 게 정확히 뭘 기준으로 나오는 건지도 몰랐고, 이게 높게 나온다고 뭐가 좋은 건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사람이란 게 시험 결과 앞에서는 일단 숨을 참게 되는 법이었다.
[결과: 등급 SSS. 이는 대한연합함대 창설 이래 최초로 산출된 SSS등급이며, 기존 최고 기록인 도현-1193 대대장의 A등급을 크게 상회합니다.]
'...미친...'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도현이 옆에서 그 메시지를 함께 봤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함장님, 방금 그 등급 표시가 정확한 겁니까"
"나도 모르겠는데, 시스템이 그렇다고 하니까..."
도현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함께 뭔가 억울함 비슷한 감정도 섞여 있었는데, 그것도 이해가 갔다. 이 사람은 최전선에서 몇 년을 싸워온 베테랑 대대장인데, 어제 처음 이 세계에 뚝 떨어진 나한테 등급이 뒤집혔으니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요컨대, 서울에서 트럭에 치여 죽은 회사원이 몇 달 만에 연합함대 역사상 최초로 최고등급을 받아버린 셈이었는데, 그 아이러니가 너무 커서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실적 평가에서 늘 중간 정도를 받던 인간이, 죽어서 다른 세계로 넘어오니 이런 식으로 등급이 매겨지는 걸 보면, 인생이라는 게 참 어디로 흘러갈지 예측이 안 되는 물건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무너진 골렘의 잔해 속에서는 놀랍게도 온전한 형태의 워프 코어 부품 하나가 발견됐다. 정비드로이드 수리-05가 그걸 스캔하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함장님! 이거 저희 엔진에 딱 맞는 규격입니다! 이거면 엔진 출력을 최소 70%까지 복구할 수 있습니다!"
"...진짜?"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골치를 썩였던 엔진 문제가 이렇게 갑자기 풀릴 줄은 몰랐는데, 사람 일이라는 게 이렇게 예상 못 한 곳에서 실마리가 풀리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수리-05는 부품을 이리저리 스캔하며 계속 감탄사를 내뱉었는데, 그 흥분한 톤이 어찌나 생생한지 로봇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함장님, 이 정도면 워프 항법도 안정적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이건 정말 엄청난 발견입니다!"
나는 그 소식에 잠시 안도했지만, 그 안도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골렘이 무너진 자리 안쪽 깊은 곳에서, 새로운 신호가 울려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냥 골렘이 완전히 꺼지면서 나는 잔여 소음인가 싶었는데, 그 신호가 점점 규칙적인 파형을 그리며 커지는 걸 보니 그런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경고: 관문 격파 신호가 광역 주파수로 자동 송출되었습니다. 발신 범위 내 모든 세력에게 위치가 노출되었습니다.]
그 문구를 보자마자 나는 표정—정확히는 시각 센서의 초점을 잃을 정도로 얼어붙었다. 요컨대 이 관문을 깨는 순간, 우리 위치가 이 성계 전체에 방송되듯 퍼져 나갔다는 소리였고, 그렇다면 이 근처에 제국군의 잔당이든 뭐든 있다면 곧장 이곳으로 몰려올 거라는 뜻이었다. 시험을 통과하면 좋은 게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시험을 통과하는 순간 위치가 만천하에 공개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함정이었다. 관문이라는 게 애초에 그런 식으로 설계된 거라면, 이건 시험이 아니라 미끼였던 셈이다.
"...부품은 구했는데, 이거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만든 거 아니야?"라고 내가 중얼거리자, 도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골렘이 무너진 방향, 그리고 그 너머 어둠 속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무거웠는데, 이 사람이 저렇게 표정을 굳힐 정도라면 이 신호가 뜻하는 위험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그리 오래지 않아 사실로 확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