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국민배우와 계약결혼이라니

3화

그 흉터를 본 이후로 나는 자꾸 서하은의 손목 쪽으로 눈이 갔다. 가느다란 선이었다. 오래된 상처처럼 흐릿했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 물어볼 수도 없어서, 나는 그냥 눈으로만 자꾸 확인했다. 그러다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쳐서 민망하게 헛기침을 했다. 한 번은 그녀가 커피잔을 들 때, 한 번은 소매를 걷어 올릴 때. 나는 매번 다른 곳을 보는 척했는데 그게 더 수상해 보였던 것 같다. "자꾸 쳐다보지 마요." "안 봤는데요." "봤잖아요, 지금도." 딱 걸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가 진짜. 속으로 나 자신을 힐난했다. 치유사라는 직업 특성상 사람 몸의 상처에 예민한 거라고 변명해봤지만, 그건 그냥 내가 만든 핑계였다. 그녀의 손목이, 그 흉터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을 뿐이다. "미안해요. 습관이라." "습관이요?" "상처 있는 곳에 눈이 가는 습관. 직업병이에요." 서하은이 나를 잠깐 빤히 보다가 소매를 슥 끌어내렸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수백 번 해본 것 같았다. "그 직업병, 저한테는 좀 자제해줬으면 좋겠는데요." "...노력해볼게요." 노력이라는 말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들린 적이 없었다. *** 그날 오후, 옆집 아주머니가 담장 너머로 얼굴을 내밀었다. 빨래를 널다가 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거기 새로 온 총각이가?" 사투리가 진했다. 억양이 높이 튀는 게 정겨우면서도 어딘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다. "네, 안녕하세요." "아이고, 서 배우님 짝이라고? 아이고 참말로 잘 왔다." 짝이라는 말에 나는 순간 뭘 어떻게 정정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아주머니는 이미 반찬통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담장을 넘어오고 있었다. "이거 좀 갖다 줘. 저 아가씨 밥도 안 먹고 사람도 안 만나고, 내가 매일 걱정혀." 반찬통은 묵직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서, 아주머니가 방금까지 부엌에서 만든 걸 그대로 들고 나온 게 분명했다. "자주 저러세요?" "몰라, 언제부터인지. 예전엔 안 그랬는데." 아주머니가 목소리를 낮췄다. 주변을 살피는 품이 마치 무슨 비밀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예전엔 어땠는데요?" "아이고, 예전엔 참 밝았지. 동네 사람들이랑 인사도 잘하고, 웃음도 많고. 그란데 어느 순간부터 딱 문을 안 열어."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몇 년 전에 여기 남자가 하나 드나들었어. 그 뒤로 딱 저래 됐어." 남자.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어떤 남잔데요?" "몰라, 나도 몇 번 봤을 뿐이여. 훤칠하고 인상은 멀쩡했는데... 그 남자 오고 간 뒤로 아가씨가 병원도 몇 번 갔다 하고, 그 뒤로는 아예 사람을 안 만나." 아주머니가 반찬통을 다시 한번 내 손에 꾹 눌러주며 말을 마쳤다. "뭐 캐물을 것도 없어. 그냥 잘해줘. 사람이 그러다가도 또 풀리는 법이여." 나는 반찬통을 들고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남자가 드나들었다. 그 뒤로 이렇게 됐다. 손목의 흉터. 이 세 가지가 머릿속에서 자꾸 이어졌다가 끊어졌다. *** 반찬통을 들고 집에 들어가자 서하은이 소파에 웅크려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문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텐데,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술 색깔까지 옅어져서,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괜찮아요?" 반찬통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요."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정확히는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팔에 살짝 소름이 돋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손이 저절로 뻗어나갔다. 치유 적성이 반응할 때 특유의 미열이 손바닥에 돌았다. 배우고 익힌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저 여자를 낫게 해야 한다는 본능 같은 것.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숨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리는 게 옷자락 위로도 다 보였다. "진정하고요, 저 그냥..." "당신들 다 똑같아." 다들, 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무겁게 떨어졌다. 그 한 단어 안에 몇 명이나 들어 있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손 뻗을 때는 다정한 척, 나중엔..." 말을 끝내지 못하고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어떤 기억이 그녀를 붙잡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남자, 그 흉터,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까이 가지 않았다. 손도 뻗지 않았다. 손끝이 저절로 꾹 눌려 왔다. 뭐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무력감이 낯설었다. "안 만질게요. 그냥 여기 있을게요." 목소리가 최대한 낮게 나오도록 신경 썼다. 놀란 짐승을 앞에 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크게 움직이면 도망칠 것 같은. 한참 침묵이 흘렀다. 거실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만 크게 들렸다. 째깍째깍, 그 소리가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어깨의 떨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가." 작게 중얼거린 말이었다. "네?" "가란 말이야, 방으로." 다시 그 벽이 세워졌다. 말투도, 표정도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조금 전 그 순간, 분명히 벽이 흔들렸다. 나는 그걸 봤다. 그리고 그 벽 뒤에 뭐가 있는지, 아주머니가 말한 그 남자가 뭘 남겼는지, 이제는 알아야만 할 것 같았다. 일어서면서 나는 반찬통이 놓인 쪽을 힐끗 봤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을 텐데, 이 상황에서 저걸 어떻게 꺼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저 여자의 방문 너머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작게, 숨죽인 울음소리 같은 것. 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들어가야 하나.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