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너진 왕비의 반격

1화

촛불 여섯 개가 신방을 밝히고 있었고, 붉은 예복을 두른 이서윤은 옷깃을 매만지며 문 쪽을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렸는데, 그 손끝에는 미처 가시지 않은 긴장이 남아 있어 옷자락을 매만지는 동작마다 옅게 떨림이 섞여 나왔다. 방 안에는 은은한 향이 감돌았고, 침상 위에 놓인 비단 이불에는 금실로 놓은 봉황 무늬가 촛불 빛을 받아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으며, 이서윤은 그 무늬를 바라보며 오늘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온 지난 며칠의 시간들을 떠올렸다. 십 년이었다. 어린 시절 청하 공작가의 정원에서 처음 손을 맞잡은 그 날, 강태윤은 아직 소년의 얼굴을 벗지 못한 채로 그녀의 손등에 살구꽃 한 송이를 얹어주며 웃었었고, 그 웃음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이서윤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내 반드시 당신 곁을 지키겠소." 그날 그가 건넨 그 말이 얼마나 무겁게, 또 얼마나 따스하게 그녀의 가슴에 자리했는지, 그 후로 흘러온 세월 속에서 이서윤은 그 말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오늘 같은 날을 그려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원에서 함께 뛰놀던 유년의 기억으로부터,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며 나눈 수많은 대화들로부터, 마침내 오늘 이 혼례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흘러온 시간이 꼭 그만큼이었으니, 이서윤은 이 밤이 오래도록 그려온 어떤 결실처럼 느껴져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드디어…….' 속으로 되뇌며 그녀는 손을 가슴께로 가져갔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서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문가에 선 태윤을 바라보았으나, 그 얼굴에는 낯익은 웃음 대신 처음 보는 서늘함이 걸려 있어 순간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왜…… 저런 얼굴을…….' 속으로 되뇌며 다가서려는데, 태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마치 벌레를 보듯 그녀를 훑어 내렸고, 그 시선의 낙차가 너무 커서 이서윤은 방금까지 품고 있던 설렘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고, 그 눈동자 속에서 지난 십 년의 세월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이서윤은 그 낯선 시선 아래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앞으로 당신과 동침하지 않겠소." 짧고 단호한 그 한마디가 신방의 정적을 갈랐고, 이서윤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여 몇 번이나 그 문장을 되짚어 보았지만, 태윤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촛불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은 그 정적 속에서, 이서윤은 자신의 심장이 세차게 뛰는 소리를 스스로 들을 수 있었고, 그 박동이 방금까지의 설렘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임을 깨달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태윤 님…… 지금 무슨 말씀을……." 말끝이 떨려 나오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며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붙잡으려 했으나, 손끝은 이미 옷자락을 움켜쥔 채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목소리마저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낯설게 들렸다. "말 그대로요. 이유는 묻지 마시오." 대꾸는 냉담했고, 그 말 속에 어떤 사정도, 어떤 미안함도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이서윤은 그 짧은 순간에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으며, 십 년을 함께해온 사람의 목소리가 이토록 낯설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그녀를 절망케 했다. 그녀는 문득 지난밤, 혼례를 앞두고 태윤이 보내온 서신을 떠올렸다. 그 서신에는 여느 때처럼 다정한 말들이 적혀 있었고, 오늘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문장으로 끝맺어져 있었는데,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이 그 서신을 쓴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그 서신은…… 그럼 무엇이었단 말인가.' 혼란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는 사이에도 태윤은 미동조차 없었고, 그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십 년을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목소리가 흐려지며 말줄임표 속으로 사라졌고, 이서윤은 그 뒤에 이어야 할 말을 끝내 찾지 못한 채 태윤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그 눈동자에는 예전의 다정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원에서 함께 나누었던 그 수많은 약속들이, 서로의 손을 맞잡고 다짐했던 그 말들이 모두 허상이었던 것처럼, 태윤의 눈빛은 그녀가 알던 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속으로 몇 번이나 그 물음을 되풀이했으나 답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았고, 태윤은 더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방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을 바라보며 이서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으나, 그 손은 허공에서 멈춘 채 끝내 그를 붙잡지 못했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단지 그의 옷자락만이 아니라 지난 십 년의 세월 전부인 것 같아 가슴이 미어졌다. "당신은 왕비의 소임을 다하시오. 그것으로 충분하오." 등을 돌린 채 던진 그 말이 마지막이었고, 그 목소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일말의 미안함도 담겨 있지 않았으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까지 이서윤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신방 전체를 울렸고, 그 둔중한 울림이 가슴 한복판을 그대로 관통하는 것 같아 이서윤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며 자리에 무릎을 꺾고 말았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느껴진 통증조차 지금 가슴을 찢는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삼켰지만, 결국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촛불이 조용히 흔들리는 방 안에서, 그녀는 붉은 예복 자락을 움켜쥔 채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고, 그 자세로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달빛이 방바닥에 길게 드리워지고, 촛불 하나가 꺼지듯 흔들리다 다시 살아나는 그 순간까지도, 이서윤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되짚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가슴속의 균열은 더 깊어져만 갔다. '십 년을…… 함께했는데.' 그 짧은 되새김마저 목이 메어 끝맺지 못한 채, 이서윤은 그저 텅 빈 눈으로 태윤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았고, 오늘 이 밤이 자신의 남은 삶을 어떤 모양으로 뒤틀어놓을지 그때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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