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숨겨진 여동생의 후견인

5화

대문은 녹슨 경첩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렸다. 끼이익. 낡은 철제 경첩이 비명을 지르듯 울렸다. 도윤은 문패를 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손끝에 남은 차가운 감촉이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들어가자."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도윤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하은이 먼저 마당으로 들어섰다. 운동화 밑창이 시멘트 바닥에 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낡은 슬리퍼가 놓인 현관, 깨진 화분 하나, 말라버린 나무 한 그루. 마당은 좁았지만 정갈했다. 누군가 오랫동안 쓸고 닦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빗자루 자국이 마당 흙바닥에 부챗살처럼 남아 있었다. 도윤은 그 흔적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이렇게까지…….' "청소는 네가 다 한 거야?" "엄마가 하던 거였는데…… 계속 했어요."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하은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운동화 코끝으로 흙을 살살 문지르는 손짓. 도윤은 더 묻지 않았다. 괜히 물었다가 저 작은 어깨가 더 움츠러들까 봐. 현관문을 열자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도윤은 미간을 좁혔다. 낯선 냄새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의 낡은 서재에서 나던 냄새와 닮아 있었다. 신발장 위에는 먼지 쌓인 액자가 놓여 있었다. 도윤의 시선이 그쪽으로 갔다. 발걸음이 저절로 그 앞으로 옮겨졌다. 세 사람이 찍힌 사진이었다. 강태식, 그리고 젊은 여자, 그 옆에 어린 하은. 웃고 있는 얼굴들. 사진 속 아버지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도윤은 사진 속 아버지의 미소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영정 사진과 똑같이 뻔뻔할 정도로 밝았다. '저렇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도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굳은 얼굴이었다. 집에서는 한 번도 저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엄마예요." 하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손가락 끝이 액자 유리를 살짝 스쳤다. "이름이……" "박수정이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아버지에게 이런 삶이 있었다는 것. 도윤이 전혀 모르던 얼굴로 살아온 세월. 관자놀이가 지끈,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심장 어딘가가 쿵, 내려앉는 듯한 낙차가 느껴졌다. '박수정. 하은. 이 집. 이 마당.' 서른 살이 넘도록 존재조차 몰랐던 삶의 조각들이 눈앞에 자꾸 쌓여갔다. 집 안은 방 두 개짜리 작은 구조였다. 좁은 복도를 지나며 도윤은 벽지의 얼룩을 눈으로 좇았다. 물이 샜던 흔적인지 누렇게 번진 자국이 천장 모서리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은의 방에는 교복 두 벌과 노트 몇 권, 그리고 벽에 붙은 빛바랜 사진들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찍은 듯한 사진, 소풍 사진, 누군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 도윤은 방을 둘러보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상자. 뚜껑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에는 통장과 서류 몇 장이 뒤섞여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상자 표면. "이게 뭐야?" 하은이 다가와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낯선 강아지처럼 보였다. "아빠가 가끔 여기다 뭘 넣어두셨어요. 저도 잘 몰라요." "열어본 적 없어?"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하셨어요." 도윤은 잠시 손을 멈췄다. 상자 뚜껑을 완전히 열기 전, 짧은 숨을 골랐다. '또 뭐가 나오려고.' 이미 예감이 좋지 않았다. 서류 하나를 꺼내 펼쳤다. 낯익은 은행 로고. 대출 계약서였다. 이미 전화로 통보받았던 채무 중 하나의 구체적인 내역을 보여주는 서류였다. 숫자를 확인한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대출 하나. 2,000만 원. 그동안 전화로만 안내받았던 채무의 실체가 서류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종이 위 숫자가 눈앞에서 흐릿하게 번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거…… 언제 받은 거예요?" 하은이 물었다.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에 든 종이가 가늘게 떨렸다. 관자놀이의 지끈거림이 이제는 뒤통수까지 번지고 있었다. '아버지, 대체 얼마나 더 숨겨둔 겁니까.' 도윤은 상자 안의 다른 서류들을 마저 뒤졌다. 카드 청구서, 무슨 계라는 이름이 붙은 알 수 없는 종이 뭉치, 만기가 한참 지난 적금 증서. 어느 것 하나 반가운 게 없었다. 숨겨진 채무의 흔적들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도윤의 손끝이 조금씩 더 하얘졌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이 방 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도윤은 서류를 접어 상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안주머니가 유난히 무거워진 것 같았다. "일단 짐부터 챙기자."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하은은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짐을 쌌다. 큰 캐리어 하나, 상자 두 개. 하은의 15년 인생이 그 안에 다 들어갈 정도로 단출했다. 교복을 개켜 넣는 하은의 손놀림이 야무졌다. 도윤은 그 모습을 흘깃 보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괜히 마음이 복잡해졌다. 노트 몇 권을 상자에 넣던 하은이 문득 멈췄다. 표지에 붙은 스티커가 반쯤 떨어져 있었다. 그것을 손끝으로 꾸욱 눌러 붙이고서야 다시 상자에 넣었다. 도윤은 그 손짓 하나가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저 나이에 저렇게까지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나.' 짐을 다 챙기고 나서야 도윤은 다시 문패 앞에 섰다. 지워진 글자의 흔적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페인트 아래로 미세하게 파인 자국이 느껴졌다. 한 글자, 어쩌면 두 글자. 박, 이라는 성씨의 형태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설마.' 도윤은 그 생각을 애써 지웠다. 지금은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한꺼번에 다 받아들이기엔 이미 머릿속이 포화 상태였다. "오빠." 하은이 캐리어를 끌며 다가왔다. 바퀴가 시멘트 바닥의 갈라진 틈에 걸려 딸그락, 소리를 냈다. "이제 여기 다시 안 와요?" "올 일이 있으면 오겠지." "…… 다행이에요." 작게 뱉은 말이었다. 바람이 스치듯 지나간 목소리. 도윤은 그 말의 무게를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한 채 대문을 닫았다. 철컹,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는 동안, 하은은 캐리어 손잡이를 꼭 붙잡고 서 있었다. 도윤이 손을 들어 택시를 세우자 그제야 어깨를 조금 내렸다. 짐을 트렁크에 싣는 도윤의 손이 여전히 미세하게 무거워 보였다. 택시가 낡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동안 하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담벼락과 전봇대를 무심한 눈으로 좇을 뿐이었다. 도윤은 그 옆얼굴을 잠깐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어볼 수 없었다. 아니,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택시 안에서 도윤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발신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화면을 확인한 도윤의 눈썹이 좁게 모였다. [강태식 씨 관련하여 재확인 요청드립니다. 통화 가능하신지요.] 또 다른 은행이었다. 도윤의 손끝이 화면 위에서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의 풍경이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동안, 그의 숨소리만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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