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조명이 쏟아지는 세트 한가운데,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그녀를 향해 나는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심장이 자꾸 목구멍 쪽으로 치솟는 걸 느꼈다. 세트장 특유의 뜨거운 조명열과 사람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속에서도 유독 그녀 주변만은 다른 온도를 지닌 것처럼 서늘하게 느껴졌는데, 그건 단순히 조명 각도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체가 만들어내는 어떤 기류 때문인 것 같았다. 스태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왔다 갔다 하는 걸 곁눈질로 확인하면서, 나는 이 자리에 선 것만으로도 이미 무언가를 시험받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3명이나 그만뒀어. 넌 다를 수 있을 것 같아?' 팀장이 아침에 던진 그 말이 귓가에 다시 울렸는데, 나는 애써 그 목소리를 밀어내며 그녀의 등 뒤로 다가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케이블선이 밟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 소리마저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촬영 스태프 한 명이 컷을 외치는 순간 그녀가 몸을 돌렸고, 나는 그 순간 숨을 잠깐 멈췄다. 서늘한 눈빛이었다.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마치 처음부터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그녀 앞에서,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담당을 맡게 된 강도윤입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울려 나조차도 조금 놀랐는데, 그녀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선을 거두며 스태프에게 다음 신을 물었다.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인 것처럼,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그 태도에 나는 순간적으로 뭘 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대답조차 없는 그 무시가 예상 밖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손끝이 살짝 저릿한 걸 느끼며 나는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스태프들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쏠렸다. 동정과 흥미가 반쯤 섞인 그 눈빛들 속에서, 나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귀가 화끈거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옆 사람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작게 웃음을 삼켰고, 또 누군가는 안타깝다는 듯 나를 향해 짧게 고개를 저었는데, 그 모든 반응들이 마치 이미 정해진 결과를 지켜보는 관객들 같아서 나는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 이게 소문으로 듣던 그 얼음공주라는 별명의 실체인 건가, 하는 생각이 스치는 사이 조감독이 다가와 슬쩍 말을 걸었다.
"매니저님, 오늘은 그냥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는 게 나을 거예요. 서현 씨 촬영 있을 땐 원래 말 거는 사람 자체가 없어서."
조언인지 경고인지 모를 그 말에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으면서도 뒤통수가 따가운 걸 느꼈는데, 아마 여전히 몇몇 스태프들의 시선이 나를 좇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날부터 이렇게 웃음거리가 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대기실에 앉아 스케줄표를 뒤적이면서도 머릿속엔 그녀의 그 눈빛이 계속 맴돌았다. 종이 위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나는 그저 그 서늘한 시선 하나에 붙잡혀 있었다.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벽을 세우는 걸까, 하는 물음이 자꾸 떠올랐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코디네이터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와 옷걸이를 정리하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입이시죠? 조심하세요, 서현 언니 진짜 무서워요."
그 말에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웃음으로 넘겼는데, 코디네이터는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근데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사람을 잘 안 믿어서 그런가 봐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사람을 잘 안 믿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왜 그렇게까지 됐는지 궁금해졌지만 차마 더 묻지는 못했다. 코디네이터는 손에 든 옷들을 정리하며 몇 마디를 더 흘렸는데, 전에 있던 매니저들이 하나같이 서현 씨의 그 냉랭한 태도를 견디지 못하고 나갔다는 이야기였다. "한 분은 아예 첫 주에 그만뒀어요. 말 한마디 못 붙여보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손끝이 다시 저릿해졌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그 세 사람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창밖으로 해가 서서히 기울어가는 게 보였고, 스케줄표 위의 시간들이 하나씩 지나가는 걸 지켜보며 나는 몇 번이나 대기실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촬영장에서 들려오는 스태프들의 말소리, 카메라 셔터 소리, 그리고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들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사람처럼, 그녀는 필요한 말 외에는 아무것도 내뱉지 않는 듯했다.
촬영이 끝난 건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 세트 밖으로 나온 그녀가 매니저 대기실 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면서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케줄표를 손에 쥔 채, 나는 최대한 정중하고 담담한 목소리를 만들어내려 애썼다.
"오늘 스케줄 정리해드릴까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물었지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됐어요."
두 글자로 끝나는 그 대답이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게 귀에 박혔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손에 든 서류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복도의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고,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는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럴 리가, 이렇게 시작부터 막히는 건가.
3개월도 못 버틴 세 사람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고, 나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손을 말아쥐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안 돼, 이렇게 첫날부터 물러설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그 서늘한 눈빛이 자꾸만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팀장의 말대로 정말 내가 네 번째 실패자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 나는 몇 번이나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보았다. 인사도 받아주지 않는 그 태도, 스케줄을 물었을 때 돌아온 두 글자짜리 대답, 그리고 코디네이터가 흘리듯 남긴 말까지. 사람을 잘 안 믿는다는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어떤 시간을 지나왔기에 저렇게까지 단단하게 벽을 쌓은 걸까. 그 답을 알기 전까지는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벽 앞에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주차장에 도착해 차 문을 열려는 순간, 저 멀리서 그녀의 차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창문 너머로 스치듯 보인 그녀의 옆모습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내일은 또 어떤 얼굴로 그녀를 마주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는 채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