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복도 끝에서 태민이 손을 흔들었다.
"작전 회의 하자."
"작전은 또 뭐야."
"성공률을 높여야지."
나는 태민을 따라 계단 아래 구석으로 갔다.
사람이 잘 지나가지 않는 곳이라 태민이 자주 이용하는 자리였다.
낡은 소화기 옆으로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고,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계단 벽을 타고 서늘하게 감돌았다.
"일단, 어제 흐름 보면 걔가 너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아."
"무슨 근거로."
"조회 직전에 웃으면서 나중에 얘기해달라고 했잖아."
그건 그냥 배려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태민은 확신에 차 있었다.
눈을 반짝이면서, 마치 자신이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으로 허공을 짚었다.
"그리고."
태민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을 이었다.
"수업 시간에 걔가 너 쪽으로 몇 번 돌아봤어."
"그건 뒤에 앉은 애랑 얘기하려고 그런 거잖아."
"뒤에 앉은 애가 너잖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어제 국어 시간에 서윤이 뒤를 돌아본 적이 몇 번 있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면 살짝 웃었다.
그때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얘기해줘.'
그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분명 별 뜻 없는 말이었을 텐데, 왜 자꾸 곱씹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오늘 확실하게 마무리 지어."
"오늘?"
"질질 끌수록 소문만 더 커져."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복도에서 몇몇이 나를 힐끔거렸다.
2학년 다른 반 애들까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심지어 급식실 앞을 지나갈 때는 처음 보는 얼굴들도 나를 쳐다봤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숙이고 걸었던 게 기억났다.
"근데 소문이 이렇게 빨리 퍼진 게 진짜 이상해."
"내가 좀 열심히 퍼트렸다니까."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했는데."
태민이 잠깐 멈췄다.
표정이 진지해졌다.
평소라면 바로 장난스러운 대답이 나올 타이밍인데, 이번엔 뭔가 다른 공기가 흘렀다.
"너 성공하면 나도 뭔가 배울 게 있을 것 같아서."
이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더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종이 울렸고, 우리는 각자 교실로 흩어졌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태민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배울 게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볼 새도 없이 태민은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
교실에 들어서자 반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몇몇이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어제까지는 그냥 모브였던 내가, 오늘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낯설고 불편했다.
책상 사이를 지나가는 동안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져서, 자연스럽게 걸으려 했지만 자꾸 발이 엉켰다.
"김도윤 진짜 이서윤 좋아한대?"
"몰라, 오늘 확실히 밝혀지겠지."
그 대화를 들으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서윤은 아직 오지 않았다.
빈 의자를 보며 심장이 계속 조여왔다.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운동장이 보였다.
아침 햇살이 뿌옇게 깔려 있었고, 몇몇 애들이 축구공을 차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안녕."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이었다.
오늘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어, 안녕."
서윤이 자리에 앉으며 나를 살짝 돌아봤다.
교복 셔츠 깃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고,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어제 하려던 말, 아직 안 끝났지?"
그 물음에 온몸이 굳었다.
주변에서 몇몇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교실 안 소음이 전부 사라진 것 같았다.
오직 서윤의 목소리만 귓가에 울렸다.
"아, 그게···."
말을 더듬는 동안 담임이 교실로 들어왔다.
"자리에 앉아라."
타이밍이 또 나를 구했다.
서윤이 웃으며 정면을 봤다.
"이따 얘기하자."
그 말을 남기고 조회가 시작됐다.
나는 책상 아래로 손을 꽉 쥐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담임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칠판에 적힌 오늘 일정도, 옆자리 애가 웃으며 던진 말도, 다 소음처럼 흘러갔다.
-
쉬는 시간, 태민이 옆으로 왔다.
"오늘은 진짜 해야 돼."
"알아."
"방과 후에 옥상으로 불러."
"옥상? 거긴 잠겨 있잖아."
"내가 열어놨어."
언제부터 준비한 건지 모를 계획이었다.
태민은 마치 이 상황을 오래 전부터 그려온 것처럼 세세하게 지시했다.
심지어 옥상 문이 잘 안 열릴 수도 있다며, 어떻게 힘을 줘야 하는지도 미리 알려줬다.
"몇 시에."
"4시. 애들 다 하교하고 난 다음."
"그때까지 뭘 해."
"기다려."
간단한 대답이었지만 그 사이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수업 내내 서윤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딴생각을 했다.
칠판 글씨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장이 튀어 오르듯 뛰었다.
'오늘 확실하게 마무리 지어.'
태민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확실하게, 라는 말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필기하던 손이 몇 번이나 멈췄다.
옆자리 애가 왜 안 쓰냐고 물어봐서, 얼른 펜을 다시 움직였다.
수업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흘렀다.
시계를 보는 것도 티가 날까 봐 참았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슬쩍 눈을 돌렸다.
분침이 거의 움직이지 않은 것 같았다.
-
종례가 끝나고, 반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서윤도 가방을 정리하며 나를 힐끔 봤다.
가방 지퍼를 올리는 손끝이 유난히 느려 보였다.
"이따 옥상으로 와줄 수 있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말을 뱉고 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을 참고 대답을 기다렸다.
서윤이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살짝 웃었다.
"알겠어."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몸에 힘이 쫙 풀렸다.
안도감과 긴장감이 동시에 밀려와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교실 뒷문 쪽에서 누군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게 보였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남학생이었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문틀에 어깨를 기댄 자세부터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너냐."
낮은 목소리가 교실 안을 울렸다.
반 애들 몇몇이 그쪽을 쳐다봤다.
누군가는 숨을 죽였고, 누군가는 눈치 없이 계속 떠들다가 뒤늦게 조용해졌다.
"김도윤이라는 애."
나는 그 시선 앞에서 몸이 굳었다.
누군지 짐작조차 안 됐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장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서윤은 옆에서 가방을 든 채, 그 남학생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