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조현목이 손짓을 하자 옆에 서 있던 보좌관이 커다란 마법영상판을 강당 정면에 띄웠다. 스무 개가 넘는 부대의 이름과 상징 문양이 차례로 나열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화려하거나 위엄 있는 문장들이었다. 사자, 매, 검, 방패. 뻔한 조합들 사이에서 나는 유독 시커먼 문양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까마귀 깃털이 겹겹이 얽힌 문장, 그 아래 새겨진 두 글자. 칠흑대.
왜인지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뭔가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마치 낭떠러지 앞에서 발끝이 저절로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랄까. 다른 문양들은 그냥 문양이었는데, 저것만은 유독 눈에 박혀서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예지몽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있으면 진작 좀 알려주지, 이 몸뚱이는 위기 앞에서만 감이 발동하는 건가.
"이번 배치식에 앞서, 여러분이 지원할 수 있는 주요 최전선 부대들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조현목의 어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저 사람이 부드럽게 말할 때는 뒤에 뭔가 칼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지금까지 겪어본 조현목이란 인간은 딱 그런 부류였다. 웃으면서 뒤통수 치는 타입.
"제국 북부 국경, 제일 검단은 생존율 팔십 퍼센트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원자 대부분이 명예를 목적으로 자원합니다." 그런 식으로 몇 개 부대를 짧게 소개하던 조현목이, 마지막으로 그 까마귀 문양 앞에서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잠깐의 정지가 유독 길게 느껴졌다. 마치 무대 위에서 클라이맥스를 준비하는 배우처럼.
"그리고 이곳, 칠흑대." 강당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몇몇 훈련생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방금까지 잡담을 나누던 옆줄 애들도 입을 다물었다. 뭐야, 다들 저 이름을 알고 있었던 건가. 나만 처음 듣는 거였나. 소외감과 불안이 동시에 밀려왔다.
"칠흑대는 마경(魔境)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으며, 최근 오 년간 배치된 신입 인원의 생존율은 삼 할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삼 할. 그 말이 귀에 박히는 순간 나는 헛숨을 삼켰다. 열 명 중 일곱은 죽는다는 뜻인가. 아니, 삼 할이라는 게 그렇게 계산되는 게 맞나.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이 조현목의 말이 이어졌다. 서른 명 중 아홉 명만 산다고 치면, 나머지 스물한 명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스물한 명 안에 내가 들어갈 확률은 얼마나 되는 건가. 확률 따위 계산해서 뭐 하나. 어차피 뽑히면 뽑히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건데.
식은땀이 슬며시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명치 아래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 부대는 지원자에게만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최근 상층부 결정에 따라 예외적으로 강제 배치 대상자를 지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제 배치. 그 말이 나오자마자 나는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이거 설마, 라는 불안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아니, 설마 그러겠나, 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심장은 계속 두방망이질을 쳤다.
이런 게 무섭다는 감정인가 보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몸이 반응하는 걸 보니 새삼 신기했다. 손가락 끝이 저릿하고, 배 속이 뒤틀리는 이 느낌.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귀족 자제들 몇몇이 서로 낮게 속닥이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강제 배치 대상자라니, 그럼 누가 뽑히든 사형선고 아닌가?" 옆에 앉은 친구가 낄낄대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배치식 시작 전부터 저렇게 얼굴이 노란 놈이 있는 거지."
그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 표정을 관리했지만, 손바닥에서는 이미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저 새끼들 지금 나 보고 웃은 거 맞지. 확실히 맞지. 저 웃음소리, 저 시선, 저 손가락질.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게 사람을 비웃는 신호였다.
속으로는 욕이 술술 나왔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냥 지루한 강의를 듣는 척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켰다.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반응하는 쪽이 지는 거다. 표정 관리 하나는 자부심 있게 해왔으니까, 지금 무너지면 안 됐다.
"저 부대에 배치되면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손을 들고 정중하게 물었다. 목소리로 보아 나이가 좀 있는 훈련생인 듯했다. 조현목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경에서 넘어오는 마물의 침투를 저지하고, 대규모 침공의 전초를 파악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이해가 가는 설명이었다. 최전선 방어, 정찰. 흔한 임무였다. 문제는 다음 문장이었다.
"다만 그곳의 부대원들은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유의 배타적인 성향이 있어 신규 배치자와의 융화가 어렵다는 평이 있습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부대라니, 게다가 배타적이라니.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불길한 조합이 하나씩 더해지는 느낌이었다. 죽을 확률 칠 할, 그것도 모자라 들어가면 텃세까지. 개연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이건 뭐 사지에 던져놓고 거기서도 환영받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설계잖아.
강당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여자들만 있는 부대에 남자를 강제 배치한다고?" "그럼 거기 들어가는 놈은 죽거나, 죽지 않으면 평생 왕따겠네." 뒤쪽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웃음소리들 사이에서 정확히 내 이름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니, 착각이 아니라 진짜 몇몇 시선이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왜 나만 보는 거야. 설마 벌써 소문이 난 건가.
"그리고," 조현목이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정확히, 틀림없이, 나를. 그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시간이 잠깐 멈춘 것 같았다. 강당의 소음도, 옆자리의 잡담도, 마법시계의 초침 소리도 다 사라지고 오직 조현목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만 남은 기분이었다. 아니 이거 설마 진짜인가.
"이번 배치식에서는 그 부대에 지원자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 상층부가 예비 대상자 한 명을 별도로 지정해 두었습니다." 강당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궁금해하는 시선으로 조현목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 역시 알 수 없는 불안에 숨을 멈춘 채였다.
예비 대상자. 그 말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어차피 지원자가 있으면 안 쓰일 자리 아닌가.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방금 조현목이 던진 시선의 무게가 그 위로를 순식간에 짓눌렀다. 왜 하필 그 순간에, 왜 하필 나를 봤는데.
옆줄에 앉은 귀족 자제 하나가 팔짱을 끼며 실실 웃었다. "누가 지원할 리가 없잖아. 삼 할짜리 부대에, 그것도 여자들만 있는 곳에 누가 자원해. 결국 그 예비 대상자가 끌려가는 거지." "그러게. 근데 그게 누굴까."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흘러왔다. 나는 그 시선을 못 본 척 정면만 노려봤다. 씨발, 이제 아예 대놓고 쳐다보네.
"발표는 정식 배치 명단이 공개된 후, 별도로 안내하겠습니다." 조현목은 그렇게 말을 끝맺고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뭐야, 그럼 지금 말한 그 예비 대상자 얘기는 왜 꺼낸 건데. 그냥 명단 발표할 때 같이 말하면 될 걸, 굳이 지금 저렇게 흘려놓고 가는 이유가 뭔데.
나는 그 애매한 여운에 더 불안해졌다.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데는 도가 튼 인간이었다. 저런 식으로 정보를 반쪼가리씩 흘려놓으면 누구든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는데,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 하는 거 보면 일부러 그러는 게 틀림없었다. 심리전인가. 아니면 그냥 저 인간 성격이 원래 저런 건가.
마법시계는 어느새 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는 십 분이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건지. 아니 정확히는 내가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서 못 느낀 거겠지. 저 시계가 영에 도달하는 순간,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시작될 거라는 예감이 점점 확신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강당 안의 웅성거림이 다시 잦아들기 시작했다. 조현목이 다음 순서를 준비하는 듯 보좌관과 뭔가 짧게 이야기를 나눴고, 마법영상판의 화면이 서서히 전환되며 부대별 지원 명단을 작성할 수 있는 양식으로 바뀌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뜻이었다.
옆줄의 귀족 자제들은 여전히 낄낄거리며 저들끼리 뭔가를 속닥이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손끝의 떨림을 감추려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손바닥에 배어 있던 식은땀이 옷자락에 슬며시 스며들었다.
칠흑대. 그 두 글자가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렸다. 까마귀 깃털이 겹겹이 얽힌 문장도, 삼 할이라는 숫자도, 예비 대상자라는 애매한 표현도, 조현목이 나를 향해 던진 그 시선까지. 뭔가 하나도 우연이 아닌 것처럼 딱딱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설마.
설마 그러겠나.
나는 애써 그 생각을 접어두려 했지만, 마법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독 크게 귓가에 울려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