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미소년의 냉혹한 반격

1화

강남역 8번 출구 뒷골목. 네온사인이 물웅덩이에 번져 있었다. 학원이 끝난 시간, 다혜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원래는 큰길로 가야 했는데 공사 중이라 골목으로 돌았다. 그게 다였다. 그냥 그게 다였을 뿐인데. 가방끈을 고쳐 메며 걸었다. 젖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비가 그친 지 얼마 안 된 골목이었다. 간판 불빛들이 흐릿하게 흩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사람 몇이 지나갔다. 러브호텔 간판 아래, 문이 열렸다. 웃음소리가 먼저 들렸다.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고개를 돌렸다. 다혜였다. 키가 작은 여자애가 남자의 팔에 매달리듯 걸어 나왔다. 남자는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혜의 머리에 나비 모양 머리핀이 흔들렸다. 1주년 기념일에 내가 사준 것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발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몸이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다혜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남자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웃음이, 나에게 보여주던 웃음과 똑같았다. 똑같았다. 눈이 사고를 놓쳤다. 저게 다혜인가. 진짜 다혜인가. 머릿속에서 같은 질문이 반복됐다. 손에 쥔 가방끈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나비 핀. 그 핀을 사던 날이 떠올랐다. 백화점 액세서리 코너에서 다혜가 그걸 집어 들고 좋아했었다. 이거 예쁘다. 오빠 이거 사줘. 나는 웃으면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그날 다혜가 지어 보였던 웃음, 지금 저 남자의 어깨에 기대며 짓는 웃음과 다른 게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렸다. 골목을 빠져나오면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걸음이 빨라졌다가 다시 느려졌다. 뭘 본 거지. 방금 뭘 본 거지. 아니야. 잘못 봤을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니까. 큰길로 나오자 사람들의 소음이 갑자기 밀려들었다. 지나가는 차들, 호객하는 목소리, 누군가의 통화 소리. 그 소음 속에서 나는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잠깐 멈춰 섰다. 지하철역 입구가 보였다. 나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손잡이를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을 때에야 내가 얼마나 땀을 흘리고 있었는지 알았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전화를 걸면, 그 목소리를 들으면,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게 확인될 것 같았다. 창밖으로 어두운 터널이 스쳐 지나갔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핏기가 없었다. 눈은 초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옆자리 사람이 힐끔 나를 쳐다봤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봤다. 화면은 켜지지도 않았는데 그냥 그렇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 다혜를 처음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3월이었다. 같은 반이었고 자리가 앞뒤였다. 나는 그때부터 머리가 길었다. 반 애들이 여자냐고 놀려도 그냥 웃어넘겼다. 다혜는 달랐다. "너 진짜 예쁘다." 첫날부터 그렇게 말했다.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웃었고, 그날부터 다혜는 쉬는 시간마다 내 자리로 왔다. "넌 왜 자꾸 나한테 와?" 내가 물으면 다혜는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그냥 좋아서." 그 말이 그렇게 무겁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때는 그냥 웃긴 애구나, 싶었다. 다혜는 밝았다. 반에서 모르는 애가 없을 정도로 발이 넓었다. 급식실에서도, 체육시간에도, 다혜가 지나가면 여기저기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용한 편이었는데, 다혜 옆에 있으면 이상하게 그 밝음이 옮아왔다. 다혜와 붙어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나까지 인기가 많아지는 기분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엔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처음 사귀자고 말한 건 다혜였다. 학교 옥상 계단,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였다. "우리 그냥 사귈까?"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는 아무 대답도 못 했다. 다혜는 그걸 승낙으로 받아들였는지 그냥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 손이 작고 따뜻했다. 중3 여름, 처음으로 몸을 섞었다. 다혜네 부모님이 지방에 내려간 주말이었다. 서툴렀고, 어색했고, 끝나고는 서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천장만 봤다. 그런데도 그 순간이 우리를 더 단단하게 묶어놓은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주말마다 만났다. 학원이 끝나면, 시험이 끝나면, 부모님이 안 계시는 틈이 생기면. 다혜는 늘 먼저 손을 잡았고, 나는 늘 그 손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기념일마다 다혜는 뭔가를 사달라고 했다. 큰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머리핀 하나, 팔찌 하나, 그런 작은 것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돈을 모았다. 다혜가 좋아하는 얼굴을 보는 게 좋았으니까.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학교가 달라졌다. 그래도 만남은 계속됐다. 주말마다, 시험이 끝난 날마다. 다혜는 여전히 밝았고, 여전히 내 손을 먼저 잡았다. 2년이었다. 중2 봄부터 지금까지, 2년. 2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다혜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 웃음이 오직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 집에 도착해서도 나는 계속 그 장면을 떠올렸다. 나비 머리핀. 어깨에 기댄 이마. 낯선 남자의 넓은 등. 방 안에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방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다혜의 웃음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골목에서 들었던 그 웃음. 나에게 보여줬던 것과 똑같은 웃음. 혹시 닮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비 핀도 그런 디자인이 흔할 수도 있고. 머릿속으로 온갖 변명을 만들어냈다. 만들면 만들수록 억지스러웠지만, 그래도 계속 만들었다. 그렇게라도 붙잡고 있어야 숨을 쉴 수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다혜'라는 이름이 떴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받았다. "오빠, 오늘 왜 안 왔어?" 목소리가 밝았다. 너무 밝았다. 방금 전까지 낯선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사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치고는 지나치게 아무 일 없는 목소리였다. "오빠? 듣고 있어?" 나는 대답을 못 하고 숨만 삼켰다. 목이 잠긴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물어봐야 하는데. 지금 어디 있었냐고, 누구랑 있었냐고, 그 핀은 왜 흔들리고 있었냐고. 묻고 싶은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오빠,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다혜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섞였다. 그게 진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연기인지, 나는 이제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다혜의 숨소리가 들렸다. 평온한 숨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었던 사람의 숨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나는 입술을 뗐다. "다혜야." 내 목소리가 낯설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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