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5화

그 유리병을 손에 쥔 순간, 나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손끝이 먼저 차가워졌다. 병의 무게는 대단치 않았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올 정도의 작은 유리병이었다. 그런데도 그 가벼움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병의 정체를 짐작하기엔 충분한 정보가 있었다. 라벨의 필체, 문구의 의미, 그리고 지난 며칠간 벌어진 일들. 그 모든 조각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그 병을 곧바로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누가 볼까 두려운 마음이었다. 사물함을 닫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옆자리 애가 신발끈을 묶으며 지나갔을 뿐인데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1교시가 시작되기 전, 나는 화장실로 가서 그 병을 다시 꺼내 보았다. 형광등 아래서 액체는 맹물처럼 투명했다. 흔들어 보니 안쪽 벽에 아주 얇은 침전물 같은 게 붙어 있는 것도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병뚜껑에는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익숙한 로고였다. 학교와 연계된 검진기관의 것이었다. 매년 신체검사 때마다 보건실 앞에 붙는 그 마크.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던 그 문양이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또렷하게 눈에 박혔다. 다시 말해, 이 액체는 진짜로 검사를 마친 것이었다. 내 채뇨는 사라진 게 아니라, 정식으로 검사기관에 넘어갔다가, 어떤 경로로든 다시 하은의 손에 돌아온 뒤, 이렇게 유리병에 옮겨져 사물함까지 온 것이었다. 그 치밀함이 나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멈춘다. 결과를 확인했으면 그걸로 끝이다. 그런데 하은은 굳이 원본을, 굳이 병에 옮겨, 굳이 내 사물함에 넣었다. 그 굳이, 굳이, 굳이가 세 번 반복되는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이건 배려가 아니었다. 표시였다. 자신이 어디까지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시. 나는 병을 다시 가방에 넣고 화장실을 나섰다. 복도 끝에서 하은이 걸어오고 있었다. 교복 재킷을 단정하게 입고, 보건위원 명찰을 목에 걸고, 걸음걸이마저 규칙적인 그 모습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못 본 척 지나가려 했지만, 하은이 먼저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었다. "받았어?" "…뭘." "알잖아." 나는 대답 대신 하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처음으로 명백한 불쾌함이 담겨 있었다. 하은은 그 표정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미소를 지었다. "검사기관에 아는 사람 있어. 결과지 원본은 못 가져왔지만, 결과는 정상이었대. 그거 알려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도현 학생 몸에 대한 얘기니까." 하은은 그 말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내놓았다. 나는 그 논리에서 어떤 틀어짐을 느꼈지만, 그 틀어짐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정확히 짚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내 방 열쇠를 몰래 복사해서 들고 있다가, 그걸 나에게 돌려주며 "네 방이니까 네가 가지고 있어"라고 말하는 기분이었다. "이거 돌려줄게." 나는 가방에서 병을 꺼내 하은에게 내밀었다. 하은은 그 병을 받지 않고 뒤로 살짝 물러섰다. 그 동작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싫어. 그건 도현 학생 거야. 나한테 준 거 아니야." "내가 준 적 없잖아." "그래도 도현 학생 몸에서 나온 거니까, 도현 학생이 가지고 있어야 해." 하은의 논리는 이상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걸 지적하는 순간, 대화가 훨씬 길어질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병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급했다. "나 수업 들어가야 해." "그래, 조심히 들어가." 조심히, 라는 말이 유독 걸렸다. 조심할 게 뭐가 있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하은은 뒤에서 따라오지 않았다. 다만 낮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던졌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돼. 그냥 안심하라고 준 거니까."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하은의 시선이 여전히 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순간 뒤를 돈다는 건, 이 이상한 게임에 응하겠다는 뜻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나는 그 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하루 종일 고민했다. 수업 시간 내내 노트 필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칠판 글씨 대신 가방 속 병의 무게만 자꾸 신경 쓰였다. 버리기엔 뭔가 두려웠고, 갖고 있기엔 소름이 돋았다. 화장실에 몰래 버릴까 생각했지만, 만약 하은이 그걸 알아채고 다시 무슨 짓을 벌일지 상상하니 그마저도 무서웠다. 결국 나는 그 병을 가방 깊은 곳에 넣어둔 채, 결정을 미뤘다. 수업이 끝나고 하교하려는데, 소희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끈을 양손으로 붙잡고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이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어제 말한 거, 진짜 오늘 떡볶이 먹으러 가자." "어, 그래." 나는 지친 얼굴로 대답했다. 소희는 그 표정을 눈치챈 듯 물었다. "오늘도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거짓말 진짜 못한다." 소희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손을 잡힌 순간 잠깐이지만 마음이 놓였다. 적어도 이 손은 무언가를 캐내려는 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학교 근처 떡볶이집으로 향했다. 가게 안은 학생들로 가득했고, 우리는 겨우 구석 테이블 하나를 차지했다. 떡볶이를 기다리는 동안, 소희는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학원 얘기, 반 친구들 얘기, 최근에 본 드라마 얘기까지. 나는 대부분 짧게 대답하며 흘려들었다. 소희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밝고 빠르게 튀었다. 그 리듬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잠깐은 유리병 생각이 흐려졌다. 그러다 소희가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 "그 보건위원 애, 요즘 너 자주 찾아와?" 나는 순간 멈칫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눈치가 그렇게 안 보이니. 계속 표정이 안 좋고, 자꾸 뭔가 숨기는 것처럼 보여." 나는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소희는 그 침묵을 놓치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나한테 말 못 할 일이면 안 해도 되는데, 그냥… 너무 심각해 보여서 걱정돼." 소희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스러움이 없었다. 나는 그 진지함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다. 채뇨 도난, 밀실 증거, 유리병까지. 어느 것 하나 평범하게 들릴 리 없었다. 소희에게 이 얘기를 다 털어놓는 순간, 소희는 분명 하은을 찾아가서 따질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로서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별거 아니야. 그냥 학교 일 처리하다가 조금 엮인 거야." "엮였다는 게 무슨 뜻인데." "그냥, 절차상 문제가 있어서 몇 번 얘기한 거야." 소희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더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떡볶이가 나오자 화제를 자연스럽게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맵기 조절 실패한 것 같아. 이거 완전 매워." "그래?" "먹어봐." 소희가 떡볶이 하나를 집어 내 입 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받아먹었다. 정말로 매웠다.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소희는 그 반응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야, 그 정도로 매워? 완전 웃긴다." "물, 물 좀 줘." "헤헤헤, 못 참는 척." 두 사람은 그 뒤로 한동안 매운맛에 대해 투덜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순간만큼은 병 얘기도, 하은 얘기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다. 소희 앞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매운 떡볶이 하나가 이상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처럼 느껴지는, 그런 짧은 평화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소희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도현아,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지?" "응." "만약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꼭 말해줘. 알겠지?" 소희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장난기 대신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소희의 얼굴 옆선을 비추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낮에 봤던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잠깐 흔들렸지만, 결국 고개만 끄덕였다. "응, 말할게." 거짓말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할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방문을 닫고 가방을 열었다. 그 유리병을 다시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투명한 액체가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병 옆면에 붙은 라벨 글씨가 형광등 빛을 받아 살짝 번쩍였다. 정상, 이라는 단어가 유독 크게 눈에 들어왔다. 정상이라는 결과를 이렇게까지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전달받아야 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그 병을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은에게서 새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내일 보건실로 좀 와줄 수 있어? 상담 시간에.〉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뒤에 붙은 한 마디가 내 마음을 다시 무겁게 눌렀다. 〈이번엔 진짜 중요한 얘기야.〉 나는 그 메시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이번엔, 이라는 표현이 마치 지난 만남들은 전부 예고편이었다는 듯 들렸다. 그렇다면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뜻이었다. 답을 보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화면 속 커서만 오래 깜빡였다. 창밖에서 바람이 창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책상 위의 유리병은 그 흔들림에도 아무렇지 않게 고요히 놓여 있었다. 마치 자신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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