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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내 이름은 이도현. 한빛고등학교 1학년. 반에서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학생이었다. 성적은 중간, 외모는 평범, 운동신경도 평범. 남들이 보기엔 그랬다. 문제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에 있었다. 나에게는 체질이 있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자아이들이 유독 나를 좋아한다는, 나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체질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반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표정이 없고, 가장 잘 우는 아이들이 늘 내 곁에 앉으려 했다. 처음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짝이었던 아이는 매일 내 지우개를 몰래 가져갔다가 다시 몰래 돌려놓았다. 5학년 때는 어떤 아이가 내 책상 서랍에 매일 사탕을 하나씩 넣어두었는데, 나는 그게 누구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리고 늘, 어느 순간부터는 그 아이들이 나만 바라보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그 체질이 최악의 형태로 터졌다. 이름은 굳이 밝히지 않기로 한다. 그 아이는 나에게 매일 편지를 썼고, 나는 그 편지를 매일 읽지 않은 채 서랍에 넣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해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 아이의 눈빛에서 이미 위험한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다만 아는 척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눈빛이 어떤 눈빛이었는지, 지금도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다. 그냥 알았다. 저건 받으면 안 되는 감정이라는 걸. 그 아이는 2학년 겨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자퇴라고 했다. 다른 얘기도 돌았지만 나는 그 얘기들을 애써 듣지 않았다. 듣는다고 달라질 게 없었고, 듣고 나면 분명히 후회할 것 같았다. 나는 그 일을 딱 한 번 후회했다. 정확히는, 후회했다는 사실 자체를 후회했다. 후회는 이해로 이어지고, 이해는 다시 그 눈빛을 부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이해하지 않는다. 누가 무슨 신호를 보내와도, 무슨 표정을 짓든, 무슨 말을 하든 — 모른 척한다. 그것이 내 방어기제였다. 세상은 가끔 무관심을 냉정함으로 오해하지만, 실은 무관심이야말로 가장 필사적인 배려일 수 있다.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체질은 여전했다. 다만 내가 더 능숙해졌을 뿐이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대답은 짧게 한다. 웃지 않는다. 누가 말을 걸어도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면 대부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식었다. 대부분은. 딱 두 명만 빼고. 옆집 사는 소희는 예외였고, 나머지 한 명은 아직 내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교실에 도착했다. 알람을 두 번 껐다가 세 번째에 겨우 일어난 탓이었다. 복도를 뛰다시피 걸으면서 게시판을 지나쳤는데, 안내문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전교생 정기 소변 검사 안내〉 1학년은 3교시가 끝나는 대로 보건실로 이동해 채뇨컵에 소변을 담아 제출할 것. 제출된 채뇨는 보건실 냉장 채뇨함에 보관되며, 방과 후 위탁 검진기관 직원이 일괄 수거해 간다는 안내였다. 특별할 것 없는, 매년 있는 절차였다. 나는 그 안내문을 별생각 없이 지나쳤다. 그냥 귀찮은 절차구나, 하고 말았다. 인생에서 가장 사소해야 할 이 일이, 앞으로 몇 주간 내 일상을 완전히 뒤집어놓게 될 줄은 물론 그때는 몰랐다. 교실에 들어서자 짝이었던 남자애가 하품을 하며 물었다. "오늘 채뇨하는 날이지?" "그런가 보네." "컵 받아왔어?" "아직." "나는 어제 미리 받아놨는데. 반장이 오늘 나눠준다더라." "그럼 그거 받으면 되겠네." 짝은 그러려니 하고 다시 엎드렸다. 나도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가야 할 하루의 일부였다. 1교시는 수학, 2교시는 영어, 다 평소와 똑같았다. 선생님 목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렸고, 창밖 하늘은 이상하게 맑았다. 그런 날일수록 아무 일도 안 일어나야 하는데, 세상은 꼭 그런 날을 골라서 일을 만든다. 3교시가 끝나자, 반장이 채뇨컵을 한 사람씩 나눠주었다. 컵에는 이름과 반, 번호를 적어야 했다. 나는 검은 매직으로 내 이름을 적었다. 이도현. 1학년 3반. 17번. 글씨가 좀 삐뚤어졌지만 딱히 다시 쓸 이유는 없었다. 보건실로 향하는 복도는 붐볐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장난이 섞였다. 누군가는 컵을 흔들며 장난을 쳤고, 누군가는 부끄러운 듯 컵을 옷 속에 숨겼다. 나는 그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걸었다. 원래도 그런 편이었다. 무리에 섞이는 것보다 무리를 관찰하는 게 편했다. 보건실 앞에 줄이 길었다. 문 안쪽에서는 보건 선생님과 보건위원 두 명이 학생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나는 줄 끝에서 무심히 앞을 바라보았다. 줄은 느리게 줄어들었고, 앞사람들의 뒷모습만 계속 눈에 들어왔다. 그때, 문 안쪽에서 컵을 받아 정리하는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보건위원 조끼를 입은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학생들이 컵을 낼 때마다 이름표를 확인하고, 채뇨함 서랍에 넣고, 그 위에 스티커를 붙였다. 동작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정확했다. 다른 보건위원들은 대충 받아서 대충 쌓아두는데, 그 아이만은 서랍 번호와 학생 번호를 하나하나 대조하고 있었다. 마치 그 절차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성격을 딱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냥 특이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그 여학생을 잠깐 보다가, 이름표를 확인했다. 정하은. 1학년 5반.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그저 눈에 걸렸을 뿐이었다. 줄이 조금씩 줄었고, 내 앞사람이 컵을 내고 지나갔다. 이제 내 차례였다. 순서가 되어 내가 컵을 냈다. 하은이 그 컵을 받아 이름표를 확인했다. 그 순간, 하은의 눈빛이 아주 짧게 바뀌었다. 아주 짧아서,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나만 알아챌 수 있었던 건, 그 눈빛이 어딘가 익숙해서였다. 예전에도 몇 번 본 적 있는 눈빛이었다. 정확히 어디서 봤는지는, 그때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도현… 3반, 17번." 하은이 내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이름을 부른 것도 아니고, 그냥 확인하는 절차였을 텐데도, 나는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목덜미쯤 어딘가가 서늘했다. "네." 나는 짧게 대답하고 시선을 거뒀다. 하은은 컵을 받아 채뇨함 서랍에 넣었다. 서랍 번호는 17번이었다. 내 번호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것이 우연인지 아닌지, 나는 그때는 궁금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숫자가 같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세상엔 그런 우연이 종종 있다.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건, 늘 한참 뒤의 일이다. 방과 후, 나는 여느 때처럼 학원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섰다. 복도에서 옆집에 사는 소희와 마주쳤다. 정확히는 두 달 전 이사 온 이웃, 윤소희였다. 같은 학년, 다른 반이었지만 이상하게 자주 마주쳤다. 어떤 날은 하루에 세 번씩 마주친 적도 있었다. "도현아아아!" 소희가 팔을 흔들며 다가왔다. 소희는 나를 부를 때 늘 애칭처럼 이름을 길게 늘였다. 나는 그게 좀 부담스러웠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티를 내면 더 좋아할 것 같았다. "오늘 채뇨했어?" "어." "난 아까 했는데, 진짜 창피하더라. 그런 걸 왜 학교에서 시키는지 몰라. 화장실 문 앞에 애들이 줄줄이 서서 기다리는데 그거 자체가 스트레스야." "매년 하는 거잖아." "그래도 창피한 건 창피한 거야. 넌 안 창피해?" "별로." "진짜 신기하다, 너는. 세상에 신경 쓰는 게 있긴 해?" 소희는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툭 쳤다. 나는 그 손짓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소희는 그런 무반응에 익숙한 듯, 개의치 않고 계속 옆에서 떠들었다. 학원 이야기, 오늘 급식 이야기, 옆 반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는 대충 듣는 척만 하며 걸었다. 소희와 걷는 길은 늘 이런 식이었다. 소희가 말하고, 나는 듣고, 가끔 짧게 대답한다. 그게 우리 사이의 균형이었다. 교문 앞에서 소희와 헤어지고, 나는 학원 버스를 탔다.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하루가 별일 없이 지나갔다는 게 오히려 좋았다. 나는 그런 하루를 좋아했다. 아무 일도 없는, 아무도 나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하루. 그날 밤, 나는 늦게까지 학원 숙제를 하다가 잠들었다. 다음 날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예감도 없었다. 책상 위에 던져둔 채뇨컵 안내문 종이 한 귀퉁이가 방 불빛에 살짝 반짝였던 것 같기도 한데, 그건 아마 내 기억이 나중에 덧붙인 장면일 것이다. 사람은 가끔 지나간 하루에 없던 징조를 끼워 넣는다. 나도 그랬다. 다음 날 아침, 보건실이 발칵 뒤집혔다. 17번 서랍의 채뇨컵이 사라졌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그 서랍의 번호가, 하필이면 내 번호와 같다는 사실을, 나는 그 순간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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