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저택으로 돌아온 은서를 맞이한 것은 위로의 말 한마디가 아니라, 아버지 설한 공작의 차가운 등이었다. 마차에서 내려 현관을 오르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딸이 이헌에게 버림받고 파혼당했다는 소식은 이미 저택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한 조각의 걱정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재로 향하는 공작의 걸음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고, 그는 문을 닫으며 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당분간 별채에서 지내도록 해라. 유서아 양이 며칠 후 이곳의 손님으로 오게 되었으니."
그 말이 방금 있었던 일인지, 혹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결론인지 은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유서아라는 이름이 아버지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오는 순간, 그녀는 온몸의 피가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헌이 자신을 버리고 서아를 택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마저 그 선택을 지지하듯 자신을 손님방도 아닌 별채로 몰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의 배신이었다.
은서는 그 말을 듣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을 버린 것이 이헌만이 아니라 아버지까지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복도의 대리석 바닥이 발밑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고,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마저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유일한 편이었던 어머니 설유란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 이제 이 저택 안에서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은 시녀 소연과 수석 집사 서준뿐이었다.
"아가씨……" 소연이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은서의 손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그녀의 작은 손은 떨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은서를 위한 것인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두려움인지는 알 수 없었다. "괜찮아요. 저는, 저는 아가씨 편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해도……"
그 서투른 위로가 오히려 은서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눈물을 보이는 것은 사치라고, 은서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짐을 챙기는 손끝이 자꾸만 무거워졌지만, 그녀는 하나씩 하나씩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넣으며 애써 담담한 얼굴을 유지했다. 옷가지 몇 벌, 어릴 적부터 지녀온 몇 가지 소지품, 그리고 늘 손에서 놓지 않던 얇은 장갑까지.
그날 밤, 은서는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던 어머니의 옛 별채로 향했다. 그곳은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즐겨 머물렀던 곳으로, 어머니가 떠난 뒤로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아 정원의 나무들조차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달빛 아래 우거진 나뭇가지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흔들렸고, 그 사이로 부는 밤바람이 은서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준이 등불을 든 채 조용히 뒤를 따르며 말했다. "마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아가씨께 전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시기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지금이야말로 그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기라니요? 서준,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은서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지만, 서준은 그저 앞장서서 걸어갈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이 저택을 지켜온 노집사의 얼굴에는 어떤 결심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별채 서재의 낡은 책장 뒤편에는, 서준이 오래전 마님의 지시로 봉인해둔 작은 방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오래된 벽처럼 보였지만, 서준이 능숙하게 특정 부분을 밀어내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숨겨진 문이 드러났다. 손잡이에 손을 얹은 순간, 은서는 왼손등이 이상하게 저릿거리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그녀가 어릴 적부터 지니고 있던 옅은 문양이었다.
늘 장갑으로 가려왔던, 별다른 의미 없다고 여겼던 그 문양이 지금은 은은한 청백색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어릴 적 유모가 그것을 볼 때마다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장갑을 씌워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특이한 반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니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방 안에는 낡은 편지 한 통과, 은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장(紋章)이 새겨진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방 안의 공기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먼지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지만, 그 상자만은 마치 방금 놓아둔 것처럼 깨끗했다. 편지를 펼친 그녀의 눈에 익숙한 어머니의 필체가 들어왔다.
"은서에게. 이 편지를 읽는 날이 왔다면, 네가 이미 큰 상처를 겪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여명 제국의 오래된 혈통을 이은 사람이었고, 너는 천 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계약의 계승자'다. 언젠가 제국의 황제가 너를 찾아올 것이다. 그를 두려워하지 말거라……"
은서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이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가늠할 수 없어 손끝이 떨렸다. 여명 제국이라니. 계약의 계승자라니. 이런 것들은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마치 오래된 전설이나 동화책 속 이야기가 갑자기 자신의 삶에 끼어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왜 이런 말을……' 은서는 편지를 든 손을 무릎에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이건 대체 무슨 뜻일까. 설마 자신이 정말 무언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까. 이헌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에게마저 외면당한 지금,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에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때, 별채 창밖에서 낮은 발소리가 들려왔고, 서준이 재빨리 몸을 세웠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허리춤의 검으로 향하는 것을 본 은서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이 늦은 밤,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이 버려진 별채에 누가 온 것일까.
문가에 서 있던 것은 은발의 낯선 청년이었다.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그의 은빛 머리카락을 비추자, 마치 서리가 내린 나무처럼 반짝였다. 여명 제국의 예복을 갖춰 입은 그는, 이곳의 복식과는 전혀 다른 낯선 문양들로 옷깃과 소매를 장식하고 있었는데, 그 정교함이 마치 세필로 그려낸 그림 같았다. 정중하지만 어딘가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실례하오. 나는 도현이라 하며, 여명 제국 황제 진하랑 폐하의 명을 받아 이곳에 왔소." 그는 은서의 왼손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역시, 그 표식이오."
은서가 놀라 손을 감추려 했지만, 도현은 이미 확신에 찬 얼굴로 초대장 하나와 오래된 열쇠를 내밀었다. 그의 손짓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된 예법서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것처럼 절도가 있었고, 그런 만큼 이곳 다인 왕국의 격식과는 사뭇 다른 이질감을 자아냈다.
"어, 저기, 잠깐만요." 은서는 당황한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 계약의 계승자라니, 그게 대체……"
하지만 도현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그대를 기다리고 계시오. 다인 왕국에는 그대를 위한 자리가 더는 없을 터이니."
그 말에는 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확고함이 담겨 있었다. 은서는 그 말이 담고 있는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삶이 이제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예감만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서준은 여전히 긴장한 채로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었고, 별채의 낡은 창문 너머로는 달빛만이 고요하게 이 낯선 만남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