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연회장의 불빛은 화려했다. 금빛 등이 천장에서 늘어져 있었고, 시종들이 술병을 든 채 종종걸음으로 오갔다. 대리석 바닥에 등불이 부서져 반사됐다. 시녀들의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 잔이 부딪히는 소리, 낮게 깔린 현악기 연주 소리. 소리들이 겹쳐서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 가운데 앉아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다. 쉽지 않았다.
"이번 혈변경계로는 명함도 못 내밀겠는데." 금혁이 잔을 흔들며 말했다. 목소리에 여유가 넘쳤다. 신통경지 칠 단계, 마룡제국의 황자. 그가 웃을 때마다 옆에 선 시종들이 같이 웃었다.
'개도 주인 따라 웃는다더니.'
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속으로만 대꾸했다. 겉으로는 잔을 내려놓는 손끝까지 정중했다.
"경계라는 게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예의를 갖춰 답했다. 겉으로는 담담했다.
"하루아침이 아니라 십 년, 이십 년을 줘도 안 될 것 같은데." 이서강이 끼어들었다. 내 오형, 명목상으로만 형이었다. 그의 눈에는 늘 나를 향한 날이 서 있었다. 서자로 태어나 버려지듯 자란 그가, 흑룡족 피가 온전히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갖는 감정을 나는 대충 알고 있었다. 알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형님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나는 웃음을 잃지 않고 받았다. 목소리는 낮고 편안했다.
"심한 게 아니라 사실이지." 이서강이 술잔을 비웠다. "천신족 피가 반, 흑룡족 피가 반. 반쪽짜리가 뭘 대단히 이루겠다고."
주변에서 웅웅거리는 잡담 소리가 잠깐 잦아들었다가 다시 커졌다. 다들 못 들은 척했지만 다 들었을 거였다.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을 못 들은 척하는 게 예의라는 걸 다들 안다.
혈변경계. 흑룡족의 인간형 변신이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었다. 손톱 끝이 미묘하게 검고, 눈동자 가장자리에 옅은 금빛 테가 남는다. 걸음이 빨라지면 등줄기 쪽 피부가 비늘처럼 일어서는 순간이 있고, 그럴 때마다 옷 위로 도드라지는 그 결이 남들 눈에 들어간다. 나는 천신족 혈통의 어머니와 흑룡족 혈통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계통의 수련법이 서로 어긋나서, 나는 완전한 인간도 완전한 용도 되지 못한 채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걸려 있는 채로 벌써 몇 년째였다.
용의 계통은 화(火)를 기반으로 기를 돌린다. 천신족은 반대로 수(水)를 기반으로 삼는다. 두 흐름이 한 몸 안에서 만나면 서로를 죽이거나, 아니면 아주 드물게 서로를 완성시킨다고 했다. 스승도 그렇게만 말했다. 드물게, 라는 말이 걸렸다. 드물다는 건 대체로 안 된다는 뜻이니까.
"십 일 뒤 천하수렵대전에서 뵙지요." 금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웃음기가 가득했다. "기대하겠습니다, 이도현 황자."
비웃음이었다. 그걸 모를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주변 대신들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도 내 편을 들지 않았다. 편을 들어봤자 얻을 게 없다는 계산이 다들 빤히 보이는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다. 나는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나쁜 버릇이었다. 누가 어떤 표정으로 나를 봤는지 기억해두는 버릇. 전생에서부터 몸에 붙은 습관이었다.
연회가 끝나고 처소로 돌아오는 길, 나는 발끝으로 자갈을 툭툭 걷어차며 걸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등롱 불빛이 회랑을 따라 줄줄이 이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짧아졌다가 했다. 별거 아니다. 익숙한 일이었다. 전생에도 나는 늘 이런 자리에 있었으니까.
전생의 나는 하급 조직원이었다. 은어왕이라 불렸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아마 은어처럼 빠르게 도망을 잘 쳤거나, 아니면 그냥 누가 술 먹고 붙인 이름이 굳어졌을 것이다. 별로 자랑스러운 인생은 아니었다. 사람들 뒤치다꺼리하고, 돈 받으러 다니고, 가끔 얻어맞고, 가끔 때리고. 그런 삶이었다. 죽을 때도 별로 극적이지 않았다. 골목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뭔가 때문에.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였고, 몸은 열 살짜리 아이였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이도현 황자라고 불렀다.
좋은 팔자로 옮겨 왔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그랬다. 밥은 매일 나왔고, 얻어맞을 일도 없었고, 누구 대신 감방에 갈 일도 없었으니까. 그 좋은 팔자에 함정이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또 그 생각이야." 목소리가 들렸다. 방향을 알 수 없는, 허공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처소 책상 위에 놓인 나침반이 스스로 빙글 돌았다. 놋쇠로 된 몸체에 낡은 유리가 덮여 있었고, 바늘은 늘 엉뚱한 방향을 가리켰다. 북쪽도 남쪽도 아닌, 뭔가 다른 곳.
"생각할 시간도 안 주냐."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대꾸했다. 겉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걸어 던졌다.
"십 일 남았어. 그 시간에 딴생각할 거면 지금부터 준비해." 나침반의 목소리는 늘 반말이었고, 늘 명령조였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더 또렷하게 말하듯, 이 물건은 나보다 더 확신에 차 있었다.
"준비는 뭘 어떻게." 나는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혈변경계가 하루아침에 뚫리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방법이 있다는 거지." 바늘이 다시 한 번 빙글 돌았다. "근데 그 전에."
"뭐."
"어제 궁녀 붙잡고 뭐 했어."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부위가 서늘해졌다. 어제 저녁, 처소를 지나가던 시녀 하나를 불러 세워 술을 권했다. 딱히 큰 목적은 없었다. 그냥, 몸이 원했다. 십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녀는 얼굴이 동그랗고 웃을 때 눈이 반달 모양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게 다였다. 딴생각을 할 만큼 정신이 온전한 상태도 아니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전혀. 완전히. 술기운은 멀쩡한데 그 부분만 고장 난 기계처럼 뻣뻣하게 굴었다. 시녀 앞에서 진땀을 뺐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진땀이 났다.
"그거 네가 한 거지." 나는 이를 갈며 물었다.
"당연하지." 나침반은 뻔뻔했다. "성능력 봉인. 딴짓하면 그렇게 돼. 십 일 동안 계속 그럴 거야."
"이런 개……" 뒷말은 삼켰다. 삼켜야 했다. 상대는 물건이었지만, 이 물건에게는 내 몸의 스위치가 달려 있었다. 협상의 여지가 없었다.
"왜 하필 거기냐." 나는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다른 걸 막아도 되잖아. 밥맛을 없애든가, 잠을 못 자게 하든가."
"그런 건 수련에 방해돼. 이건 방해 안 되잖아." 나침반이 태연하게 답했다. "오히려 집중력이 올라가지 않아?"
"안 올라가. 오히려 신경 쓰여서 더 못 하겠는데."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불만 있으면 말해봐. 대신 들어줄 생각은 없어." 나침반의 바늘이 이번엔 나를 정확히 가리켰다. 마치 표적을 겨누는 것처럼.
나는 한숨을 쉬며 이불 위로 몸을 던졌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금빛으로 조각된 용의 문양이 천장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봐온 문양인데도 오늘은 유독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비늘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새겨진 조각인데, 정작 그 용의 피를 반쪼가리로 물려받은 나는 저 문양 절반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 나는 결국 물었다.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일 알려줄게." 나침반은 짧게 답하고 조용해졌다. 유리 덮개 안 바늘이 다시 엉뚱한 방향을 향해 멈췄다.
"야. 야, 잠깐만." 나는 벌떡 일어나 나침반을 흔들어봤다. 소용없었다. 놋쇠 몸체는 그냥 차갑고 딱딱한 물건으로 돌아가 있었다. 사람 말을 하다가 갑자기 이러는 게 제일 얄궂었다.
나는 그 밤, 잠들지 못했다. 성능력이 봉인된 것도 짜증났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다른 거였다. 금혁의 비웃음. 이서강의 눈빛. 십 일 뒤의 대회.
머릿속으로 대회 규정을 다시 짜맞춰봤다. 천하수렵대전은 각국 황자, 왕자, 후계자급 인물들이 모여 실력을 겨루는 자리였다. 명목상으로는 사냥 경합이지만, 실제로는 그 나라의 무력과 위신을 대외적으로 재는 무대였다. 지난 대회에서 마룡제국은 삼 년 연속 상위권을 차지했다. 우리 쪽은, 솔직히 말해서 십 년째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하위권의 대표 주자가 나였다.
이대로 가면 진다. 이건 확신이었다. 혈변경계로는 어림도 없었다. 완전한 변신 상태에 도달한 자와, 손톱 끝만 겨우 검어지는 나 사이의 격차는 굳이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나침반의 유리 덮개가 그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저 물건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문제는, 그 뭔가가 나한테 좋은 소식일지 나쁜 소식일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이 물건을 처음 만난 게 언제였더라. 열 살, 이 몸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자다가 눈을 떴는데 책상 위에 이게 놓여 있었다. 아무도 놓아둔 사람이 없었다. 물어봐도 다들 그런 게 있었냐는 얼굴이었다. 그날 밤부터 이놈은 말을 걸어왔고, 그날 이후로 내 몸에는 이상한 규칙들이 하나씩 생겨났다. 딴짓하면 봉인. 규칙 어기면 봉인. 말 안 들으면 봉인. 모든 협박의 결론이 봉인이었다.
처음엔 저항도 해봤다. 나침반을 서랍 깊숙이 처넣고 며칠을 버텨봤는데, 사흘째 되던 날 오한이 나서 열이 39도까지 올랐다. 나침반을 다시 꺼내자 열이 바로 내려갔다. 그날 이후로 저항은 접었다.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물건 덕에 살아남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궁 안의 암투, 독이 든 음식, 자객의 칼날. 나침반이 미리 알려주지 않았으면 이 몸도 벌써 몇 번은 관에 들어갔을 거였다. 그러니 밉다고 무작정 내던질 수도 없는 사이였다. 미운 정 고운 정이 반씩 섞인, 아주 이상한 동거인.
밖에서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부엉부엉. 처소 지붕 어딘가에 자리를 잡은 놈인데, 매일 밤 같은 시간에 같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밤을 새운 날이 벌써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었다.
나는 이불을 다시 끌어당겼다. 몸은 피곤한데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눈을 감아도 금혁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고, 눈을 떠도 이서강의 날 선 시선이 어른거렸다. 이런 밤은 자야겠다고 마음먹는 순간부터 이미 실패였다. 그냥 눈 감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나침반은 정말로 뭔가를 말해줬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십 일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짧게 느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