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소꿉친구의 백번째 진심

4화

교실 안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을 때, 지우는 이미 하윤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 손의 힘이 얼마나 셌는지, 하윤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몸이 반쯤 끌려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의자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 누군가의 낮은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을 등 뒤로 흘리며 지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교실 문을 나설 때 스치던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하얗게 느껴졌던 것도, 그 순간의 이상한 긴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발 밑창이 바닥을 미끄러지듯 스치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언어였다. 계단 앞에서 지우는 방향을 틀었고, 하윤은 그저 끌려가는 대로 발을 옮겼다. 계단 아래,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구석에는 먼지 냄새와 오래된 분필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그 냄새가 코끝에 닿는 순간에야 지우의 손이 놓였다. 하윤은 손목에 남은 지우의 손자국을 느끼며 숨을 골랐다. 붉게 눌린 자국이 마치 낙인처럼 선명했다. "고마워." "고마워하지 마." 지우의 목소리는 씹어삼키듯 낮았다. 그 낮음이 평소의 서늘함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걸, 하윤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다. "뭘 그렇게 화가 났어." "화났냐고?" 지우가 처음으로 정면으로 하윤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게 분노인지 다른 무엇인지 하윤은 구별할 수 없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의 빛이 지우의 얼굴 반쪽에만 걸려 있어서, 나머지 반은 그늘 속에 묻힌 채였다. "너 아까 완전히 얼어 있더라. 그게 뭐였는지 알아?" 하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목구멍 안쪽이 마른 종이처럼 뻣뻣하게 느껴졌다. "거짓말한 게 들킬까봐 무서웠던 거잖아." 지우의 목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을 짚은 손끝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근데 왜 그렇게까지 무서워하는데. 그게 그냥 애들 앞이라 창피해서야, 아니면…" 말이 거기서 끊겼다. 지우는 뒷말을 삼킨 채 시선을 피했고, 그 침묵이 하윤에게는 어떤 완결된 문장보다 더 무겁게 다가왔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지나갔지만, 그마저도 이 좁은 구석까지 닿지는 못했다. "지우야." "됐어." "내 말 좀…" "됐다니까." 지우는 벽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 자세가 평소의 여유와는 다르게, 어딘가 방어적으로 보였다. 어깨의 각도가 미묘하게 굽어 있었고, 시선은 하윤의 얼굴이 아닌 그 어깨너머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나 사실, 계속 이상했어." 지우가 낮게 말을 이었다. "너가 누구한테 고백했다는 게. 누구한테 차였다는 게. 그게 다 이상했어.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하윤의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그 박동이 손끝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뭐가 이상해." "너, 그런 애 아니잖아." 지우가 고개를 돌려 다시 하윤을 보았다. "누구 좋아한다고 그렇게 쉽게 말할 애가 아니잖아. 근데 그렇게 말했으니까, 나는…" 다시 문장이 끊겼다. 지우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내렸는데, 그 모습이 평소의 냉정함과는 전혀 다른, 낯선 균열처럼 느껴졌다. 하윤은 그 균열의 틈으로 무언가가 비어져 나오는 걸 지켜보면서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1학년 때, 기억나?" 지우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앞으로 계속 같이 다니자고." "그게 왜…" "그때 나는 별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어. 그냥, 당연한 약속인 줄 알았어." 지우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너는 그냥, 늘 내 뒤에 있었어." 지우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내가 앞에서 걸으면 너는 항상 반 걸음 뒤에서 따라왔어. 근데 그거, 당연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잖아.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였을 수도 있잖아."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하윤은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지우의 목소리에 실린 어떤 외로움 같은 것이, 처음으로 또렷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같이 다니자.」 언젠가 하윤 자신이 뱉었던 그 말이, 지금 이 순간 다시 귓가에 울렸다. 그때는 그저 가벼운 인사말 같았던 문장이, 시간이 지나 이렇게 무거운 무게로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 아마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지우야, 나는…" "아니야, 됐어." 지우가 손을 들어 하윤의 말을 막았다. 손바닥이 하윤의 입술 바로 앞에서 멈췄다가, 이내 힘없이 내려갔다. "오늘은 그냥, 아무 말 하지 마." 지우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처음의 그 날카로움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 갈라진 틈으로 새어 나오는 듯한, 가느다란 떨림만이 마지막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발걸음은 평소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지만, 그 속도 안에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뒷모습이 평소보다 작게 느껴졌다. 그렇게 크던 그림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이는 이유를, 하윤은 짐작만 할 뿐 확신할 수 없었다. 계단 위로 사라지는 지우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하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복도의 형광등은 여전히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어딘가에서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 지금 이 순간의 하윤에게는 아주 멀게 느껴졌다. 손목에 남은 지우의 손자국이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그 온도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하윤은 문득 그 손이 조금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날 밤, 하윤은 이불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지우의 말을 되짚었다. 「너는 그냥, 늘 내 뒤에 있었어.」 그 문장이 왜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애틋함과 원망이 뒤섞인 그 눈빛을, 하윤은 밤새 떠올리며 잠들지 못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커튼 사이로 가늘게 스며들었고, 그 빛의 결이 방 안 어둠 속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윤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지우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 말 뒤에,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얼마나 더 있을지, 그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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