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누나 얘기를 나눈 날 이후로, 나는 이도현을 보는 눈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처음엔 그냥 편한 존재였다. 갈 곳 없는 나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준 사람. 이유를 캐묻지도,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매일 저녁 상을 차려주는 사람. 그 정도의 고마움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가 부엌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는 것만 봐도 이상하게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도마 위에서 칼질하는 손목의 움직임, 국자를 들고 냄비를 젓는 팔의 각도,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토요일 알바가 끝나고 늦게 돌아온 밤이었다. 편의점에서 계산대를 보다가 문득 그가 알려준 시간표대로 반찬을 챙겨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낯설어서 손이 잠깐 멈췄다. 손님이 카드를 내미는데도 나는 몇 초쯤 멍하게 서 있었다.
"저기요, 학생."
손님의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카드를 긁었다.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면서도 머릿속엔 여전히 그 생각이 맴돌았다. 왜 하필 지금 이런 생각이 드는지. 다른 일들도 많은데.
집에 돌아오니 역시나 식탁 위에 랩을 씌운 반찬 그릇이 놓여 있었다. 옆에 짧은 쪽지도 있었다. 데워 먹어. 국은 냄비에. 딱 그 두 줄이었는데, 나는 그 별것 없는 글자들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필체는 반듯했고, 글자 사이의 간격도 일정했다. 그 정갈함이 이도현이라는 사람 자체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다.
이런 걸로 마음이 이렇게 움직이는 게.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한 컵 따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늦은 밤 골목엔 가로등 하나만 켜져 있고, 그 아래로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그 풍경이 평소보다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더 크게 보이는 법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방 안 커튼 너머로 이도현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자고 있었다. 나는 그 조용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조용히 곱씹었다.
급식실에서 애들이 우리를 두고 수군거리던 것도, 도현이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리던 태도도, 다 좋았다. 좋다는 말로도 부족한 감정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런 식으로 마음이 기울어본 적이 없었다. 억울해서 눈물이 났던 밤도 있었고, 외로워서 뒤척였던 밤도 있었지만, 이런 종류의 두근거림은 처음이었다.
이 마음의 이름이 뭘까.
답을 알면서도 나는 굳이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눈을 감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도현보다 먼저 부엌에 서 있었다. 계란이라도 부쳐볼 생각이었는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는 것부터 서투른 손짓이 튀어나왔다. 기름이 튀어 손등에 튀는 바람에 나는 작게 비명을 삼켰고, 계란을 깨뜨리다가 껍질 조각이 그릇 안으로 떨어져 손가락으로 건져내야 했다. 이런 것도 못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 무렵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뒤늦게 일어난 그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는 얼굴로 다가왔다. 머리는 살짝 눌려 있었고, 눈은 아직 반쯤 감긴 채였다. 그 얼굴을 아침에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게 처음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뭐 하는 거야."
"밥, 나도 할 수 있어."
"계란 태우고 있잖아."
"아직 안 탔거든."
그가 뒤에서 손을 뻗어 불을 줄이며 프라이팬을 흔들었다. 그 순간 그의 팔이 내 팔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는데, 별것 아닌 그 접촉에 나는 심장이 한 박자 크게 뛰는 걸 느꼈다. 팔뚝에 닿았던 온기가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가 이상하게 뜨거운 느낌이었다.
이 정도로 반응하다니.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괜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쨌든 나도 할 줄 안다는 거 보여주고 싶었어."
"그래, 잘 알았어."
그가 완성된 계란말이를 접시에 옮기며 대충 대답했다. 노릇하게 잘 말린 계란말이가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이는 걸 보니, 내가 만든 것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그 무심함이 살짝 서운했다. 나는 그 서운함의 정체를 곱씹다가, 문득 이상한 결심에 이르렀다.
두근거리게 만들어주고 싶다.
이 애가 나를 그냥 여동생처럼, 무심하게 대하는 게 아니라, 나를 볼 때 저 애도 한 번쯤 심장이 덜컥하는 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스스로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마음은 이미 또렷하게 자리를 잡아버린 뒤였다.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동안에도 나는 그의 표정을 흘깃흘깃 살폈다. 그는 태연하게 국을 뜨고, 계란말이를 집어 먹으며, 휴대폰 화면을 한 번씩 들여다보았다. 그 익숙한 아침 풍경 속에서 나만 혼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오빠." 나는 식탁에 앉으며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응."
"나 오늘 알바 끝나고 좀 늦을 것 같은데, 걱정 안 해도 돼?"
"왜 걱정을 해."
너무 즉각적인 대답에 나는 살짝 입을 삐죽였다. 이 반응이 나오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승부욕이 생겼다. 나는 젓가락으로 밥알을 뒤적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글쎄, 여동생이 늦으면 걱정되는 거 아니야?"
일부러 그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여동생이라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나는 그 단어가 어떤 벽처럼 느껴졌고, 오늘은 그 벽을 살짝 건드려보고 싶었다.
도현의 표정이 아주 짧게 흔들렸다. 미간에 잔물결이 스치듯 지나갔다가, 곧 원래의 담담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 짧은 순간, 그의 젓가락질이 아주 잠깐 멈췄던 것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걱정되지, 당연히."
대답은 정석대로였는데, 그 잠깐의 흔들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걔, 지금 좀 당황했지.
그 생각에 나는 속으로 픽 웃었다. 밥그릇을 다 비우고 그가 설거지를 하러 일어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조금 더 대담해져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정도 흔들림이라면, 조금 더 밀어붙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학교 가는 길, 나란히 걷는 그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며, 나는 앞으로 이 벽을 어떻게 더 건드려볼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여동생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지키고 있는 이 애가, 언제까지 그 말을 붙잡고 있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고, 입김이 하얗게 번져나갔다. 그 입김 사이로 그가 무심코 던진 말들, 표정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걷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들떠 있었다.
이 벽, 생각보다 얇을지도 몰라.
그런데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반 애들 몇이 다급한 얼굴로 뛰어오는 걸 보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 표정들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장난스럽게 다가오던 애들과는 다른, 뭔가 큰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리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은아, 큰일 났어. 너 담임이 부모님 오시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