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관리인이 문 앞에 붙이고 간 종이는 노란 형광펜으로 테두리가 둘러쳐져 있었다. 명도소송, 임차료 삼 개월 연체, 기한 내 미납 시 강제집행. 딱딱한 활자들이 눈에 들어오는데도 머릿속으로는 좀처럼 뜻이 이어지지 않아서, 나는 그 종이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말도 안 돼.
중얼거리면서도 이상하게 침착했다. 종이를 든 손끝이 조금씩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원룸 안의 온기가 다 빠져나간 것도 아닌데, 그 냉기는 방이 아니라 종이에서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니는 나였다. 반장 선거에 나가면 표를 다 가져가고, 체육대회에서는 이인삼각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하고, 수학 시험지에는 백 점이 찍히는, 흠잡을 데 없는 서하은. 다들 나를 완벽하다고 했다. 담임은 나를 볼 때마다 "역시 하은이"라고 했고, 급식실에서 밥을 받을 때조차 옆에 서 있던 애들이 내가 뭘 고르는지 곁눈질로 따라 하곤 했다. 그런데 그 완벽한 서하은의 통장에는 지금 이 원룸의 월세도, 다음 달 밥값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계좌를 다시 열어봐도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만 이천 원.
한 달을 살아야 하는데.
부모님한테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했지만, 그 생각은 신호가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지워졌다. 아빠는 재혼한 지 얼마 안 됐고, 엄마는 새 남자친구와 지방으로 내려간 지 반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둘 다 나한테 생활비를 부치는 걸 서로에게 미루다가 결국 아무도 부치지 않게 된 게 이번 달로 벌써 세 번째였다. 처음엔 실수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착오라고 믿었다. 세 번째가 되니 그건 그냥, 내가 두 사람 모두에게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뜻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아빠는 이번 주에 신혼여행 사진을 단체 채팅방에 올렸다. 엄마는 지난주에 새 남자친구가 사준 목걸이를 자랑하는 문자를 보냈다. 둘 다 내게 안부를 물었지만, 그 안부 뒤에 돈 얘기를 붙이면 항상 대답이 늦어졌다. 늦어지다가, 결국 없어졌다.
짐을 쌀 곳도, 맡길 곳도 없다는 게 이렇게 무섭다는 걸 열일곱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친구들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반에서 나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들은 많았지만, 정작 내가 며칠만 재워달라고 부탁할 만큼 가까운 애는 하나도 없었다. 다들 나를 좋아했지만, 아무도 나를 몰랐다. 생일마다 선물은 쌓였지만, 그중 누구도 내가 원룸에 혼자 산다는 걸 몰랐다. 다들 내가 부모님과 함께 넓은 아파트에서 산다고 믿었다. 나는 그 오해를 굳이 정정한 적이 없었다. 그게 편했으니까.
그게 내가 만들어놓은 완벽함의 대가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 게 우습고, 서글펐다.
창문 너머로 옆방 불빛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205호. 이 복도 끝, 내 방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그 방에는 같은 반 남학생이 살고 있었다. 이도현. 반에서 존재감이 거의 없는 애였다. 창가 쪽도 아니고 복도 쪽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에 앉아서 쉬는 시간마다 조용히 책을 읽거나 창밖을 보는 애. 나와는 딱히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 건물에 이사 온 첫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 그가 짐 가방 하나를 대신 들어준 적이 있었다. 별말 없이, 그냥 무겁겠다고 한 마디 하고는.
그날 나는 이삿짐센터도 부르지 못한 채 캐리어 두 개와 상자 몇 개를 혼자 나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누군가 손을 뻗어 문을 잡아줬다. 이도현이었다. 같은 반인 걸 알아본 건 그 애가 아니라 나였는데, 그는 나를 알아보고도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그냥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무겁겠다" 한마디만 했다. 그러고는 자기 층에서 내리면서 짐을 문밖까지 옮겨주고 사라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애가 몇 시에 나가고 몇 시에 들어오는지, 대충 알게 되었다. 늦은 밤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는 항상 비닐봉지에 반찬통 같은 걸 들고 있었고, 인사를 하면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이는, 그런 애였다. 한번은 그 반찬통 안에서 새어 나온 냄새가 김치찌개 같아서, 나는 저녁도 못 먹은 채로 침만 삼켰던 기억이 있다.
이도현은 학교에서도 혼자였다. 급식을 늦게 받아서 혼자 앉아 먹는 날이 많았고, 체육 시간에 조를 짤 때도 늘 남는 쪽에 속했다. 나는 그 애를 딱히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신경 쓸 이유가 없었으니까. 완벽한 서하은의 세계에는 이도현 같은 애가 낄 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 애의 방 창문에 켜진 불빛을 보고 있었다.
지금 저 방에 불이 켜져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안이 됐다.
갈 곳이 없다.
그 생각이 명치 근처에서 뭉치더니 목까지 차올랐다.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나는 종이를 손에 쥔 채로 방문을 잠깐 바라보다가, 결국 겉옷을 걸치고 복도로 나섰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로 계산하기 전에 몸이 205호 앞에 서 있었다.
복도의 센서등이 깜박이며 켜졌다. 낡은 형광등 소음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발밑 타일은 차가웠고, 겉옷을 걸쳤는데도 목덜미로 한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종이를 다시 한번 내려다봤다. 강제집행. 그 세 글자가 눈에 박혔다.
문을 두드리기 전에 잠깐 숨을 골랐다. 창피함과 절박함이 동시에 밀려왔고, 그 두 감정이 서로 밀고 당기는 사이 나는 이미 손가락을 문에 대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려는 거지?
같은 반이지만 이름도 몇 번 안 불러본 애한테, 이 시간에, 이런 몰골로.
그래도 다른 문은 없었다.
두 번, 세 번.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긋한 걸음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채였다.
"……하은이?"
문틈으로 얼굴을 내민 이도현이 나를 알아보고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헐렁한 티셔츠에 실내용 바지 차림이었고, 손에는 아직 펼쳐진 채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더니, 뭔가 잘못된 걸 눈치챈 사람처럼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나는 그 순간 목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손에 쥔 종이를 그의 눈앞으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