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나를 원하지 않는 남자

4화

다과회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여옥 부인은 서윤을 따로 정원의 작은 정자로 초대했는데, 그날은 마침 겨울 볕이 유난히 맑아서 정자 안까지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정자로 향하는 길목의 나무들은 이미 잎을 다 떨어뜨린 채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고, 그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서윤의 발끝에 짧은 그림자를 그려 넣었다. 후작가에 들어온 뒤로 서윤은 이 저택의 정원을 몇 번이나 오갔지만, 그때마다 시선을 아래로 두고 걸음을 재촉했을 뿐, 이렇게 볕을 온전히 느끼며 걷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시종이 앞서 안내하며 정자의 문을 열어 주었을 때, 서윤은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걸까.' 부인이 자신을 따로 부른 적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기에, 그 낯선 부름 자체가 조금은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부인은 따뜻한 차를 두 잔 준비해 두고, 서윤이 자리에 앉기를 기다리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찻잔 옆에는 작게 구운 다식이 얌전히 놓여 있었는데, 계핏가루의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정자 안의 서늘한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오늘은 그냥 편하게 이야기나 나누고 싶어서 불렀어요." 부인의 그 말에 서윤은 살짝 긴장했던 어깨를 조금 늦추며 마주 앉았다. 자리에 앉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것은, 이 저택의 어른들 앞에서는 늘 몸가짐 하나까지 재단당하는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는데, 부인의 목소리에는 그런 압박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부드럽게 데우는 것 같았고, 그 온기가 서윤에게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었다. 손끝으로 찻잔을 감싸 쥐자 도자기의 매끈한 표면을 타고 온기가 손바닥까지 전해졌고, 서윤은 그 작은 열기에 의지하듯 잔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서윤 양은 바다를 좋아하나요?" 부인이 문득 던진 그 질문에, 서윤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본 바다가 참 좋았던 기억이 있어요." 기억을 더듬는 사이, 서윤의 눈앞에는 아주 오래전,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었던 모래사장의 풍경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파도가 발끝을 적시고 다시 물러가던 그 반복이 신기해서 몇 번이고 웃었던 기억이었는데, 그 뒤로는 다시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 가문에 남해 쪽 별장지가 하나 있는데, 그곳이 정말 아름다워요."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살짝 반짝였는데, 그 표정에는 단순한 자랑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장소를 사랑하는 사람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지어진 작은 저택인데, 여름이면 소금기 섞인 바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오고, 밤이면 별이 바다 위로 쏟아지는 것처럼 보이지요." 부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끝으로 찻잔의 테두리를 가만히 어루만졌는데, 그 손짓에는 오래전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는 듯했다. "그곳에는 담장이 낮아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바다까지 걸어 내려갈 수 있어요. 겨울에도 눈이 거의 오지 않고, 대신 바람에 소금기가 섞여서 옷깃에 자꾸 하얀 자국이 남지요." 부인은 그 말을 하며 작게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정자 안의 공기를 한층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 서윤은 그 묘사를 들으며 마음속에 처음으로 어떤 풍경 하나가 그려지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알던 저택의 답답한 공기와는 전혀 다른, 트인 하늘과 넓은 바다가 있는 세계였다. 후작가의 벽은 언제나 높고 두꺼웠고, 그 안의 시선들은 언제나 서윤의 걸음걸이 하나, 말투 하나까지 지켜보고 있었는데, 부인이 그려낸 그 별장지에는 그런 벽도, 그런 시선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곳이 정말 있다면.' 그 생각이 스치자, 서윤의 가슴 어딘가가 처음으로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이가 더 들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요." 부인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서윤 양이 맡아서 관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고요." 그 말에 서윤은 순간 숨을 삼켰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에게 건네지 않았던 종류의 제안이었다. 단순히 며느리로서, 혹은 혼약자의 의무로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무언가를 책임지고 가꿔나갈 수 있는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상상이 처음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뭔가를 맡아도 되는 사람인가.' 그런 물음이 뒤따랐지만, 그 물음 뒤에는 뜻밖에도 옅은 설렘이 함께 따라붙었다. 지금까지 서윤에게 주어진 일이란 대개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몫을 조용히 채우는 것뿐이었는데, 누군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맡긴다'는 말을 건넨 것이었다. "저는... 아직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서윤이 조심스럽게 대답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미 옅은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부인은 그런 서윤의 표정을 살피며 부드럽게 웃었다.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곳에서는 아무도 서윤 양을 이래저래 재단하지 않을 테니까." 부인은 그 말을 하며 서윤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었는데, 그 손길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찻잔의 열기보다도 오히려 더 서윤의 마음을 데우는 것 같았다. "여기서는 서윤 양이 무엇을 입든, 무슨 말을 하든 다들 잣대를 들이대려고 하지만, 그곳에서는 그럴 사람이 없어요. 바다와 바람뿐이니까." 그 말이 서윤의 마음 깊은 곳을 조용히 건드렸다. '아무도 재단하지 않는 곳.' 그것은 곧, 도현의 냉담함과 무관심에서도, 후작가의 엄격한 시선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틈새처럼 느껴졌다. 서윤은 그 틈새를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짚어 보았는데, 그럴수록 그 틈새는 점점 더 선명한 형체를 가진 하나의 장소로 자라나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서윤은 창밖으로 흘러가는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고 있었다. 마차의 바퀴가 자갈길 위를 지날 때마다 작은 흔들림이 몸을 타고 올라왔지만, 서윤은 그 흔들림조차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도현의 아내로서, 후작가의 며느리로서 주어진 자리를 채우는 것만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여겼는데, 이제는 그 너머에 무언가 다른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눈이 채 녹지 않은 들판이 하얗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위로 부인이 말했던 남해의 푸른 바다가 겹쳐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본 적도 없는 풍경인데도, 이상하게 그 색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단이가 옆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부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어요, 아가씨?" 서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대답했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대한 이야기였어." 그 대답에 단이는 별다른 뜻을 두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서윤의 마음속에서는 그 바다 풍경이 이상하게도 계속 잔상처럼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단이의 눈에는 그저 부인이 젊은 며느리에게 좋은 곳을 소개해 준 것 정도로 보였을 뿐이었으나, 서윤에게는 그것이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잔상은, 며칠 뒤 서윤이 도현과 다시 마주하게 될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녀의 태도에 작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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