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나를 원하지 않는 남자

2화

혼약 발표가 있은 지 며칠 뒤, 서윤은 처음으로 온후 후작가의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다. 마차가 저택 정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정원의 나무들마저 너무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어 숨이 막힐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가지 하나 삐뚤어진 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그 손질된 풍경이, 오히려 서윤에게는 이 저택 전체가 살아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곳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길게 늘어선 상록수 사이로 하얗게 남은 눈이 그림자처럼 깔려 있었고, 그 위로 겨울 햇살이 얇게 부서지고 있었지만, 그 빛조차 이곳에서는 차갑게만 느껴졌다. 시종 단이가 그녀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옷매를 다시 정돈해 주며, "긴장하지 마세요, 아가씨." 하고 낮게 속삭였지만, 그 말이 오히려 서윤의 긴장을 더 짙게 만드는 것 같았다. 옷깃의 끈을 매만지는 단이의 손끝이 유난히 조심스러웠는데, 그것이 마치 유리 인형을 다루는 손길 같아서, 서윤은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다루어져야 할 존재인가 하는 생각에 잠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깨질까 봐 저러는 건가, 아니면 이미 깨진 걸 감추려는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마차에서 내렸을 때, 저택의 정문을 지키던 시종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절도 있는 동작 하나하나가 서윤을 더욱 작게 만드는 듯했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도현이 먼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서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그저 짧게 시선만 던졌다. 창을 등지고 앉은 그의 옆얼굴에 옅은 겨울빛이 걸쳐 있었는데, 그 무심한 태도에 서윤은 순간 당황했지만, 애써 표정을 가라앉히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지나치게 푹신했고, 등받이는 지나치게 높았으며, 그 사이에 앉은 자신은 지나치게 작아 보였다. 실내에는 나무 향과 은은한 차 향이 섞여 있었는데, 그 향기조차 도현의 냉랭한 분위기 앞에서는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했다. 벽면을 따라 늘어선 서가에는 두꺼운 책들이 빈틈없이 꽂혀 있었고, 그 책들의 등에 새겨진 금박 글씨가 창밖 햇빛을 받아 이따금 번쩍였는데, 그 빛마저도 서윤에게는 경고처럼 느껴졌다. '여긴 사람이 사는 곳인가, 전시된 곳인가.' "차는 됐소." 그가 시종이 내려놓으려던 찻잔을 손짓으로 물리며 짧게 말했을 때, 서윤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배려인지 그저 성가심의 표현인지 구분할 수 없어 잠시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찻잔이 다시 쟁반 위로 올라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는데, 그 작은 소음 하나에도 자신의 존재감이 이 방 안에서 얼마나 미미한지가 새삼 실감되었다. 도현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살피는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고, 그 옆얼굴의 무표정함이 서윤에게는 벽처럼 느껴졌다. 그 벽 너머에서 도현은 사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여자가 어깨를 지나치게 곧게 세우고 있는 것이, 그저 예의를 갖추려는 것으로만 보였을 뿐, 그 안에 숨겨진 긴장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그는 원래 침묵이 편한 사람이었고, 그 침묵을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만나야 할 것이오." 도현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는데, 마치 업무 일정을 통보하는 듯한 말투였다. 서윤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알겠다는 뜻을 표했지만, 속으로는 이 관계가 앞으로도 계속 이런 온도로 유지될 것이라는 예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기적으로, 라니.' 마치 계약서에 명시된 조항을 읽는 것 같은 말이었는데, 그 조항 안에 자신의 이름이 어떤 방식으로 적혀 있을지, 서윤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몇 번째 목요일인지, 미리 알려 드릴까요." 서윤이 겨우 그렇게 물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작게 흩어졌다. 도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는데, 그 무심한 몸짓이 서윤에게는 그나마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자신이 그저 일정표의 한 칸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서글픔을 함께 남겼다. "할 일은 그것뿐이오.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서윤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 그 생각이 들자 목덜미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것이 수치심인지 억울함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방 안의 공기가 순간 무겁게 가라앉는 것 같았지만, 도현은 그 침묵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듯 태연했다. 도현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다시 서류 몇 장을 뒤적이며 다른 이야기를 이어갔는데, 그 태도가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느껴져 서윤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서류를 넘기는 손가락에 얕은 굳은살이 배겨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손이 검을 쥐어온 세월을 짐작케 했으나, 그런 사실이 지금 이 순간의 서운함을 덜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 어떤 동요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이만."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짧게 말했을 때, 그것이 대화의 끝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을 서윤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가 문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에도 별다른 인사말은 덧붙지 않았는데, 그 무뚝뚝함에 서윤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자리에서 따라 일어나며 예를 갖췄다. 응접실을 나서는 길, 단이가 서윤의 옆에 붙어 걸으며 낮게 투덜거렸다. "아가씨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너무하시네요." 서윤은 그 말에 옅게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이 얼마나 공허한지는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괜찮아. 원래 그런 관계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서윤은 마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계속 도현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복도를 지나며 창 너머로 눈에 덮인 정원을 다시 마주했을 때, 조금 전 도착할 때와 똑같은 풍경인데도 어쩐지 더 쓸쓸해 보였는데, 그것이 정원이 변한 탓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변한 탓임을 서윤은 알고 있었다. 단이가 무언가 더 말을 붙이려다가, 서윤의 표정을 살피고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그 말은 마치, 그녀가 이 혼약 안에서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선언 같았다. 마차가 저택을 벗어나 완만한 언덕길을 내려가는 동안, 서윤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겨울 나무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자신이 이 관계 속에서 대체 무엇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되묻고 있었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눈송이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것을 보며, 서윤은 문득 자신도 저 눈송이처럼 아무 이유 없이 그 자리에 매달려 있다가, 아무 이유 없이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그녀는 아직 찾을 수가 없었다. 마차가 저택의 담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도, 서윤의 시선은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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