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며칠 뒤였다.
은채는 저녁을 먹으러 오자마자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알았다.
늘 먼저 눈을 마주치고 웃던 아이가, 그날은 시선을 바닥에 두고 신발을 벗었다.
식탁에 마주 앉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숟가락을 든 손이 자꾸 멈췄다.
국그릇 안에서 숟가락이 몇 번이고 방향을 바꾸는 걸, 나는 가만히 지켜봤다.
"무슨 일 있어?"
내가 먼저 물었다.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기다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등록금 얘기예요."
한참 뒤에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집에서 조금 힘든 상황이라···. 다음 학기부터 장학금을 못 받을 수도 있대요."
그 말을 하는 동안 손끝이 계속 그릇 가장자리를 만지고 있었다.
동그란 그릇 테를 따라, 손톱 끝이 같은 자리를 몇 번이고 돌았다.
"성적은 유지했는데···, 학교 정책이 바뀐다고···."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흐려졌다.
나는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냥 밥을 한 숟갈 더 얹어줬다.
"일단 먹어."
"···고마워요."
작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유난히 작게 들려서, 나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잠깐 은채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숙인 고개 아래로 목덜미의 잔머리가 몇 가닥 흘러나와 있었다.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그날 처음으로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 은채는 좀처럼 웃지 않는 날이 늘었다.
수업 얘기를 해도 대답이 짧았고, 예전처럼 실없는 소리로 나를 웃기려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매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일곱 시가 조금 지나면, 복도 끝에서 그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반복될수록, 나는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녁이 되기도 전에 밥솥에 밥을 안치고, 은채가 좋아하는 반찬이 있는지 냉장고를 두 번씩 확인하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도 조금 낯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의동 로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은채 씨."
차현수였다.
계단을 내려가던 나는 그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로비 한가운데, 은채가 서 있었고, 그 앞에 현수가 여유로운 자세로 서 있었다.
구두 끝이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었다.
그 구두에서 시작된 시선이 슬쩍 위로 올라가, 각 잡힌 슬랙스와 셔츠 소매를 지나, 손에 들린 작은 카드에 닿았다.
그가 은채 앞에 손을 내밀며 뭔가를 건네고 있었다.
작은 카드였다.
카드 귀퉁이가 은채의 손끝에 닿았다가, 조심스럽게 옮겨졌다.
"이번 주말에 시간 어때요? 밥이라도 같이."
은채가 카드를 받아 들며 머뭇거렸다.
"저···."
"생각해봐요. 급한 거 아니니까."
현수가 여유롭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웃음이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눈에 밟혔다.
나는 계단 위에서 그 광경을 그대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자세 그대로,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불쾌한 건지, 불안한 건지 스스로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계단 한 칸을 내려서지도, 그대로 서 있지도 못한 채, 나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이 흩어질 때까지 지켜보기만 했다.
현수가 손을 흔들며 자리를 뜨고, 은채가 카드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서 있는 동안, 나는 계단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그날 저녁, 은채는 여느 때처럼 내 방에 왔다.
하지만 표정이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식탁에 앉아서도 몇 번이나 입을 열려다 말았다.
"저기, 도현 씨."
"···응."
숟가락을 든 채로, 나는 애써 시선을 그릇에 두었다.
"차현수 선배가 밥 먹자고 했어요."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숟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숟가락 끝이 그릇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가려고?"
최대한 무심하게 물었지만, 목소리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모르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밥알을 세듯이 뒤적였다.
"그냥, 스터디 때문에 계속 챙겨주셔서···."
"스터디면 스터디지, 밥약속은 왜 잡아."
말이 조금 더 튀어나갔다.
"그게 왜 밥약속으로 이어지는 건데."
말이 툭 튀어나갔다.
은채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눈동자가 조금 커진 채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도현 씨, 지금 표정이··· 좀 무서워요."
"···아니야."
나는 애써 표정을 풀었다.
입가에 억지로 힘을 빼려 했지만, 턱 끝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냥, 걔가 원래 좀 그런 스타일이라."
"어떤 스타일이요?"
"···됐어. 밥이나 먹어."
대충 얼버무리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지만, 밥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은채도 더는 묻지 않고 조용히 밥알을 씹었다.
그 침묵이, 평소의 편안한 침묵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식탁 위 두 개의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이 났다.
하지만 그 밤, 은채가 돌아간 뒤에도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빈 그릇을 치우면서도, 손끝이 자꾸 헛돌았다.
창문 너머로 그녀의 방 불빛이 켜졌다가 꺼지는 걸 지켜보며, 나는 처음으로 어떤 감정을 인정해야 할지 모른 채 서 있었다.
불빛이 꺼지는 순간까지, 나는 창가에서 떠나지 못했다.
〈도현 씨, 지금 표정이··· 좀 무서워요.〉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무서웠던 게 아니라, 그저 잃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옆방 문 앞에 낯선 쪽지 하나가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문고리에 반쯤 접힌 종이가 걸려 있었다.
손끝으로 펼치는 동안, 심장이 먼저 뛰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 잠깐 나갔다 올게요.〉
그 아래,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었다.
익숙한 카페 이름과, 오후 두 시라는 시간.
차현수가 말한 그 약속이었다.
종이를 쥔 손이 천천히 힘을 잃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문고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