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오전, 새 프로젝트 킥오프 회의가 잡혔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계약과와 개발사업팀 합동 회의.
그냥 흔한 월요일 아침이라고 생각했다.
회의실로 들어가면서 서지안 옆자리에 앉았다.
습관처럼.
서지안이 노트북을 켜는 손끝을 보며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개발사업팀 관계자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넥타이를 고쳐 매는 사람, 서류를 정리하는 사람.
그중 한 사람이 문턱을 넘는 순간, 옆에서 낮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서지안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서지안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방금까지 노트북 화면을 보며 옅게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뭐지.
"오랜만입니다, 서지안 씨."
남자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웃는 낯인데 눈은 웃지 않는, 이상한 미소였다.
서지안은 인사를 받지 않았다.
고개도 들지 않았다.
"이재현 부장님이십니다. 이번 프로젝트 총괄이세요."
타부서 팀장이 소개했다.
이재현.
머릿속에서 뭔가 딸깍,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서지안의 이메일에 있던 그 이름이었다.
지난주 서지안 자리를 지나가다 얼핏 본 발신자명.
그때는 그냥 스쳐 지나갔는데.
이 남자가 그 이재현이라고.
회의가 시작됐지만 나는 자료에 집중이 안 됐다.
곁눈질로 서지안을 계속 봤다.
서지안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티가 났다.
서류만 뒤적이고, 펜만 굴리고, 화면만 보고.
그런데 이재현은 유독 서지안에게만 자꾸 말을 걸었다.
"서지안 씨는 여전하네요. 여전히 일 잘하고."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딱딱했다.
평소 서지안답지 않게.
"예전 생각나서 그래요. 우리 그때, 나쁘지 않았잖아요."
회의실 안 공기가 순식간에 이상해졌다.
누가 봐도 사적인 발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누군가는 헛기침을 했고, 누군가는 괜히 서류를 넘겼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서지안의 손끝이 테이블 아래서 꾹, 눌려 있었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이 보였다.
펜을 쥔 손이 아니라 그냥 허벅지 위에 놓인 손이었는데도, 마디마디가 하얗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저게 뭔데 저러는 거야.
저 사람 도대체 뭔데.
회의가 끝나고 다들 자료를 챙기며 자리를 뜨는 사이, 이재현이 서지안을 붙잡았다.
"잠깐 얘기 좀 하죠."
"할 얘기 없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는데, 그게 더 소름 끼쳤다.
나는 그 자리를 지나칠 수 없었다.
"프로젝트 자료 검토가 필요해서요. 서지안 씨, 이거 먼저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일부러 끼어들었다.
손에 아무 자료도 없었으면서, 있는 척 서류철을 흔들었다.
이런 즉흥 연기, 내 특기는 아닌데.
이재현이 나를 훑어봤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평가하는 눈빛이었다.
"동기라던 그 강도윤 씨?"
"네, 맞습니다."
"둘이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말투에 묘한 뉘앙스가 섞여 있었다.
사이가 좋아 보인다는 말이 왜 저렇게 들리는 건지.
"업무 파트너니까요."
내가 짧게 답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게 힘을 줬다.
이재현이 웃으며 서지안을 다시 봤다.
"지안 씨,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우리 관계, 정리 안 된 것 같은데."
관계.
정리.
저 단어들이 서지안의 얼굴을 몇 번이나 굳게 만드는지, 이재현은 알고 하는 말인가.
서지안이 아무 대답 없이 자리를 떠났다.
걸음이 빨랐다.
도망치는 사람처럼.
나는 그 뒷모습을 따라갔다.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비상계단으로 들어서자 서지안이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숨이 가늘게 떨렸다.
가슴이 오르내리는 게 보일 정도로.
"괜찮아요?"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과 다르게, 서지안의 눈에 눈물이 차 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안 흘리려고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는 게 보였다.
나는 그냥 서 있었다.
뭘 해야 하는지 몰라서.
손을 뻗어야 하나. 어깨를 잡아야 하나.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이에요."
말이 뚝뚝 끊겨 나왔다.
"전 회사 상사였고요.
헤어질 때 많이... 힘들게 했어요."
힘들게 했다는 말이 얼마나 많은 걸 눌러 담고 있는 건지, 짐작도 못 하겠어서 나는 그냥 침을 삼켰다.
목이 텁텁했다.
"그래서 이 회사로 옮긴 거고,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는데."
서지안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벽에 기댄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나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옆에 서 있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어설픈 위로가 오히려 상처가 될까 봐 입을 열기가 무서웠다.
"괜찮을 거예요."
짧게 말했다.
"제가 있잖아요."
말해 놓고 나서 스스로도 좀 놀랐다.
이게 이 상황에서 할 말인가.
근데 이미 입 밖으로 나가버렸다.
서지안이 나를 올려다봤다.
눈이 붉게 젖어 있었다.
속눈썹에 눈물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무언가 명치 쪽에서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비상계단 문이 벌컥 열렸다.
이재현이었다.
"여기 있었네요. 둘이 뭐 하는 거예요?"
목소리에 웃음이 걸려 있는데, 그게 웃음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서지안이 순간 몸을 굳혔다.
어깨가 딱딱하게 굳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서지안 앞을 반쯤 가로막았다.
계산할 시간도 없이, 몸이 먼저 그렇게 움직였다.
"업무 얘기 중이었습니다."
"업무 얘기를 여기서요?"
이재현이 비웃듯 말했다.
계단 위 형광등 빛이 얼굴에 이상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지안 씨, 이런 사람이랑 얽히지 마요. 나중에 곤란해질 텐데."
이런 사람.
저 말이 나를 향한 거라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뭘 두고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근데 화가 났다.
확실하게.
"그건 부장님이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낮게 깔렸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재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뭔가 다른 게 떠올랐다.
"강도윤 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
계단에 정적이 흘렀다.
아래층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지나갔지만, 이 좁은 공간 안의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서지안이 내 팔을 붙잡았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 온도가 얇은 셔츠 소매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이재현의 눈이 나와 서지안을 번갈아 훑었다.
시선이 우리 사이 붙잡힌 팔에서 멈췄다.
무언가 확신한 듯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 그런 사이였어요?"
그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비상계단의 형광등이 지지직, 소리를 냈다.
깜빡이는 불빛 아래로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다시 짧아졌다.
무언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지점을 지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부정할 말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