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야근 동기의 술버릇 비밀

2화

인수인계는 서류 세 장짜리 메모로 끝났다. 담당자가 바뀌었습니다. 이후 업무는 두 분이 협의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전부였다. 세 장짜리 메모 어디에도 어떻게, 언제, 얼마나 라는 설명은 없었다. 나머지는 우리 둘이 알아서 하라는 뜻이었다. 첫날부터 야근이었다. 계약서 오십 건이 밀려 있었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잠깐 숨이 막혔다. 이게 다 뭐지. 설마 이걸 오늘 다 보라는 건가. "이거 다 오늘 안에 끝내야 해요?" 서지안이 모니터를 보며 물었다. 목소리에 벌써 지친 기색이 묻어 있었다. "내일 오전까지 결재 올려야 하니까요." "미쳤네요." 미쳤다는 말에 나도 동의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첫날부터 상사한테 미쳤다는 말을 하는 신입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저녁 아홉 시가 되자 사무실에 우리 둘 목소리만 남았다. 키보드 소리, 프린터 소리, 그리고 이따금 서지안의 한숨. 나는 계약서 항목을 하나씩 대조하면서도 자꾸 서지안 쪽으로 눈이 갔다. 미간을 찌푸린 채 화면을 들여다보는 옆얼굴이, 볼펜을 딱딱 두드리는 손끝이, 자꾸 신경 쓰였다. 동기라서 그런 거다. 그냥 동기라서. "강도윤 씨." "네." "이거 야근 수당 나오는 거 맞죠." "안 나올걸요." "...그럼 저 술 마셔야 해요." 서지안이 단호하게 말했다. 표정이 진지해서 웃음이 나왔다. "지금 진지하게 하는 말이에요?" "당연하죠. 저 스트레스 받으면 꼭 뭘로든 풀어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매번 술이에요?" "그럼 뭐가 있어요. 운동은 귀찮고, 쇼핑은 돈 없고." 그 말에 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었다. 서지안이 뭘 잘했다고 저렇게 뿌듯한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지만,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야근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결국 자정 넘어 일이 끝났다. 서지안은 벌써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한잔만 하고 가요." "내일도 출근인데." "딱 한잔이요." 딱 한잔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회사 앞 포차에서 소주 세 병이 순식간에 비었다. 서지안은 안주가 나올 때마다 눈을 반짝였다. 계란말이, 감자전, 순대볶음. 젓가락질이 그렇게 빠른 사람을 처음 봤다. "이거 진짜 맛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감탄사가 나왔다. 회사에서 보던 서지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결재 서류를 볼 때는 눈썹 사이에 세로줄이 잡히던 사람이, 감자전 한 조각에 저렇게 행복해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강도윤 씨는 뭐 좋아해요? 안주 말고." "딱히 없는데요."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다 뭐라도 좋아하잖아요." "...매운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오, 그거라도 하나 건졌다." 서지안이 웃으며 소주잔을 들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러다 술이 조금씩 들어가자, 말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강도윤 씨는요." "네." "저 어떻게 생각해요." "동기잖아요." "그거 말고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물만 마셨다. 컵 속의 물이 반쯤밖에 안 남았는데도 계속 들이켰다. 목이 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마르는지. "그니까 제가 궁금한 건..." 서지안이 말을 이으려는 순간, 눈이 스르륵 감겼다. 테이블 위로 얼굴이 툭, 떨어졌다. "저, 서지안 씨." 반응이 없었다.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이 사람 진짜, 궁금한 걸 물어보다 말고 잠들어버리면 어쩌라는 거야. 나는 한숨을 쉬면서도 웃음이 났다. 서지안의 이마가 테이블에 닿을 듯 말 듯 위태로워서, 결국 손으로 받쳐줬다. 이모님이 다가와서 한마디 하셨다. "둘이 사귀는 사이여?" "아, 아니요. 그냥 회사 동기예요." "그래? 아까부터 보니까 아니던데." 아니던데, 라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오래 박혔다. 결국 택시를 잡아 서지안을 태우고 나도 뒤따라 탔다. 주소는 다행히 핸드폰에 저장돼 있었다. 택시 안에서 서지안은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서지안의 얼굴이 밝아지고 어두워지고, 그 반복을 나는 그냥 가만히 지켜봤다. 기사님이 백미러로 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집 앞에 내려서 겨우 깨웠다. "다 왔어요. 일어나요." "음... 여기 어디예요..." "집이요." "진짜요? 대단해요, 강도윤 씨." 대단하다는 말이 왜 그렇게 뿌듯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별거 아닌 말인데, 그냥 택시 태워서 데려다준 것뿐인데, 그 한마디에 기분이 이상하게 좋았다. 서지안은 비밀번호를 세 번이나 틀리고서야 겨우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까지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서지안이 무사히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서야 발을 돌렸다. 다음 날 아침, 서지안은 아무것도 기억 못 했다. "저 어제 많이 실수했어요?" 조심스럽게 묻는 얼굴이 새삼 낯설었다. 어젯밤 감자전에 눈을 반짝이던 사람과, 지금 잔뜩 움츠려 눈치를 보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냥, 잠들었어요." "...다행이다."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서지안이 안도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 물어봤던 질문을 말해주지 않았다. 저 어떻게 생각해요, 라던 그 말. 말해주면 어떻게 될까. 서지안은 아마 그날로 나랑 눈도 못 마주칠 거다. 아니, 어쩌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입을 다무는 게 맞는 선택 같았다. 그날 오후, 옆 팀 김선배가 커피를 사 들고 찾아왔다. "둘이 요즘 아주 그냥 부부생활이더만, 야근에 술까지." "부부생활이 아니라 강제노동입니다." "에헤이, 다 알어. 다 알어." 김선배가 능글맞게 웃으며 갔다. 뭘 안다는 건지, 나는 되묻지 않았다. 되물어봤자 더 이상한 말이 돌아올 게 뻔했다. 서지안은 옆에서 못 들은 척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귀가 살짝 빨개진 게 보였다. "김선배님 말은 신경 안 써도 돼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저 사람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술자리는 매일 반복됐다. 서지안이 술을 못 참는 성격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뒷수습은 언제나 내 몫이 됐다. 어떤 날은 서지안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겠다고 우겨서 포차 사장님한테 한 소리를 듣기도 했고, 어떤 날은 술김에 회사 상사 흉을 보다가 목소리가 너무 커서 내가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그럴 때마다 서지안은 다음 날 기억을 하나도 못 했고, 나는 매번 아무 일도 없었다고 둘러댔다. 하루는 서지안이 취해서 회사 단체 메신저에 "강도윤 씨 얼굴 진짜 잘생겼어요 ㅋㅋㅋㅋ" 라고 보낸 걸 자정 넘어 발견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서지안이 이걸 알면 죽으려 할 텐데. 화면을 캡처해서 어디 보관해두고 싶은 마음과, 지금 당장 지워서 서지안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결국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나는 재빨리 메시지를 지웠다. 그리고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지운 메시지의 알림이 이미 몇 명한테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내일 출근하면 또 누가 무슨 소리를 할지, 그것도 걱정이었지만 그보다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서지안 씨는 내 얼굴을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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