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치료사님, 또 다치셨어요?

3화

만찬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차피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회복원 접수대에서 흘러나오는 소문이란 게 원래 반나절이면 김빠진 탄산수처럼 시들해지는 법이니까. 그런데 다음 날 오전, 대기 명단을 확인하러 갔다가 그 이름을 또 마주치고서는 그 다독임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이틀 연속이라니.' 명단 맨 위, 다른 이름들을 다 밀어내고 올라와 있는 라엘린 설잎이라는 세 글자를 보며 나는 잠깐 멍하니 서 있었는데, 옆에서 붕대를 정리하던 동료 진료사 유하가 내 표정을 보고는 대뜸 물었다. "또 그 손님이야?" "응." "이야, 인기 많네. 우리 원장님 얼굴에 벌써 아부 미소가 걸려 있을 것 같은데." 유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말로 원장실로 불려갔다. 손태술은 책상 위에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앉아, 마치 내가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이 어쩐지 이번엔 다른 종류의 긴장을 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귀족한테 굽신거리는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그가 서두를 그렇게 열었을 때 나는 이미 그다음 말이 뭘지 알고 있었다. 이런 말을 앞세우는 사람은 결국 정반대의 부탁을 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이번 손님은 예외로 좀 신경 써줬으면 해. 라엘린 설잎이라는 손님은 무조건 우선 순위로 배정하라고." "이유가 있으신가요?" "그분이 그 유명한 그 검사님 파트너라잖아. 이안 별해 경 말이야. 우리 회복원 평판에도 좋을 거야." 평판보다는 뒷돈이나 특전을 기대하는 눈치가 얼굴에 다분히 드러나 있었지만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이 회복원에서 일한 지 벌써 몇 달, 원장의 저런 계산적인 눈빛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는 걸 뼈저리게 배웠기 때문이다. '어차피 손님을 우선으로 보는 건 내 일이기도 하니까.' 나는 그냥 알겠다고 답한 뒤 진료실로 돌아왔다. 진료실 문을 닫고 나서야 나는 약초함을 정리하며 잠깐 숨을 돌렸다. 어제 다녀간 자리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 붕대 조각을 치우면서, 나는 왜 자꾸 같은 사람이 이틀이나 연속으로 다치는지 잠깐 의아해했다. '데이트하다가 넘어졌다기엔 좀 이상한데.' 하지만 딱히 물어볼 처지도 아니고, 손님 사정을 캐묻는 건 회복사의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도구를 정리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오전 열한 시가 되자 정확히 그 시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어제와는 다른 색의 드레스를 입은 라엘린이 서 있었는데, 옅은 청록색 천이 그녀의 금발 위로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물 위에 비친 달빛 같았다. 이번에는 팔목이 아니라 오른쪽 발목에 붕대가 대충 감겨 있는 게 눈에 들어왔고, 그 감긴 모양새가 어제 팔목에 감겨 있던 것보다 더 엉성해서 나는 순간 누가 저렇게 대충 감아줬는지 궁금해졌다. "또 오게 됐네요." 그녀가 살짝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나는 발목 상처를 확인하려고 자리를 권했는데, 그녀가 의자에 앉으며 치맛자락을 살짝 걷어 올리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애꿎은 약초함만 응시했다. '이건 그냥 업무야, 업무.' 스스로 되뇌면서도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목을 감싸 쥐는 손끝이 미세하게 굳는 걸 느꼈다. 붕대를 풀어내자 드러난 상처는 어제 팔목의 것보다 조금 더 깊었다. 발목 안쪽, 복사뼈 아래로 이어지는 곡선을 따라 붉은 자국이 나 있었는데 마치 뭔가에 세게 부딪힌 흔적 같았다. '넘어졌다기엔 위치가 좀 이상한데.' 나는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말 없이 회복 능력을 흘려 넣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발목 안쪽 곡선을 따라 온기가 스며드는 동안, 나는 또다시 배로 빠져나가는 기운에 이마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원래 회복 능력이란 게 상대의 상처가 깊을수록 내 쪽에서 빠져나가는 기운도 커지는 법인데, 이 손님을 상대로는 유난히 그 소모가 크다는 걸 이틀째 실감하고 있었다. '설마 이 손님 체질이 유별난 건가.' 나는 잠깐 딴생각을 하다가 다시 손끝에 집중했다. "오늘도 힘들어 보이시네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이 부위가 원래 좀 그래요' 라는 말을 삼켰다. 발목이라는 부위가 유독 기운을 많이 요구한다는 건 순전히 지어낸 변명이었지만, 그렇다고 진짜 이유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신 상처가 유난히 깊게 나서요, 라고 말하면 또 무슨 오해를 살지 몰라.' 발목 치료가 끝나갈 무렵, 그녀가 문득 물었다. "당신은, 이름이 뭐죠?" 나는 순간 대답을 머뭇거렸다. 게임 속에서 회복 NPC였던 내게 이름을 물어본 사람이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님들은 보통 나를 그냥 '거기요' 나 '회복사님' 정도로 불렀고, 그 이상의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름이라니.' 나는 잠깐 손을 멈춘 채 눈만 깜빡였다. "라온입니다." "라온." 그녀가 그 이름을 한 번 되뇌더니 조용히 웃었다. "어울리네요, 밝은 사람이라는 뜻이라던데." 그 말에 나는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고, 얼른 손을 떼며 치료가 끝났다고 알렸다. 회복 능력을 다 흘려 넣은 발목은 이제 붉은 자국도 없이 깨끗해져 있었는데, 그녀는 그 발목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여기 회복사님들이 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맞았네요." "과찬이십니다." 나는 짧게 답하며 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다가 문득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늘도 검문소 훈련이 있어서, 이따 다시 나가봐야 하는데." 그 한마디에 나는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검문소 훈련이라니.' 데이트 중에 다치는 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훈련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뭔가 다른 그림이 그려졌다. 그녀가 단순히 데이트 때문에 다치는 게 아니라 뭔가 위험한 임무를 반복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고, 그렇다면 이틀 연속으로 다친 것도 우연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팔목이랑 발목, 매번 다른 데를 다치는 것도 이상하고.' "검문소 훈련이면… 많이 위험한 일인가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잠깐 나를 보다가 애매하게 웃었다. "뭐, 늘 하던 일이니까요. 걱정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 대답이 어딘가 능숙하게 훈련된 말투처럼 들려서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더 물어봐도 별 대답은 안 해줄 것 같은데.' 그녀가 문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정리하던 붕대를 마저 접었다. 그녀가 문을 나서기 직전, 나는 그녀가 원장에게 붙잡혀 잠깐 대화를 나누는 걸 우연히 엿듣게 됐다. 진료실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은 틈으로 원장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는데, 특유의 아부성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 "이안 별해 경과의 관계는 여전히 순탄하신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그 순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나도 모르게 문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이런 걸 물어보다니, 원장님 정말 못 말리네.' 회복원 원장이라는 사람이 손님의 사생활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캐묻는 걸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라엘린은 그 물음에 짧게 웃으며 대답을 흐렸다. "그건, 뭐, 잘 모르겠네요." 목소리에 별다른 동요는 없었지만, 그 애매한 답변이 유난히 귓가에 오래 남았다. 나는 문틈으로 그녀가 걸어 나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왜인지 모르게 방금 치료했던 그 발목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검문소 훈련, 그리고 그 잘 모르겠다는 대답.' 두 가지가 묘하게 겹쳐지면서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남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그때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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