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오후 예약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이상하게 진료실 안을 서너 번씩 둘러보며 괜히 약초함 위치를 바꾸거나 붕대 뭉치를 다시 정리하는 짓을 반복했다. 이미 완벽하게 정돈된 서랍을 열었다가 닫고, 멀쩍이 놓아둔 소독약 병을 다시 한 뼘 옮기고,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는데, 이런 행동이 다 헛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이 자꾸 움직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긴장하는 거지.'
게임 속에서 수백 번 봤던 얼굴을 실제로 보는 게 처음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녀가 공식 히로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괜히 위축되는 건지 스스로도 명확히 설명이 안 됐다. 그냥 동네 진료소에 붕대 감으러 오는 손님인데 뭘 이렇게까지, 하고 스스로를 다그쳐 봐도 심장은 내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이럴 거면 진작 다른 일을 배웠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손끝이 차가워졌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는 그 모든 잡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본 순간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 금빛 장발이 어깨를 넘어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옥빛 눈동자는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화사한 드레스 자락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르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는데, 목선을 따라 흐르는 곡선은 조각가가 며칠 밤을 새워 깎아낸 대리석 같았고, 손끝을 스치는 자세 하나하나가 거장의 화집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잘 세공된 세밀화 속 인물이 그대로 걸어 나온 것 같았다.
'진짜 라엘린이다.'
수백 번 렌더링된 일러스트로만 보던 얼굴이 눈앞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잠깐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는데, 그런데 그녀의 왼쪽 팔목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소매 자락을 물들이고 있는 걸 발견한 순간, 나는 감상에 젖을 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히로인이고 뭐고, 피부터 닦아야 하는 게 이 직업의 숙명이었다.
"팔 좀 보여주시겠어요."
그녀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별다른 경계심 없이 팔을 내밀었는데, 그 자연스러운 태도에 나는 오히려 더 당황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낯선 진료사 앞에서 한 번쯤은 몸을 움츠리거나 눈치를 보게 마련인데, 그녀는 마치 나를 원래부터 알던 사람처럼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소매를 걷어 올리자 팔목 안쪽에 길게 찢긴 상처가 드러났고, 나는 서둘러 그 상처 위에 손을 얹으며 회복 능력을 흘려 넣기 시작했는데, 손바닥에 닿는 그녀의 피부가 이상하게도 서늘하면서 부드러워서 나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팔목 안쪽, 하필.'
부드러운 부위를 치료할 때 힘이 배로 빠져나간다는 그 지긋지긋한 페널티가 이번에는 유독 심하게 작동하는 것 같았다. 마치 물이 새는 항아리에 억지로 물을 붓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흘려 넣는 만큼 어디론가 줄줄 새어나가는 감각이 뱃속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이마에 땀이 배어 나오는 걸 느끼면서도 손을 떼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그녀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나왔다.
"이 정도는 늘 있는 일이라서요."
있는 일은 맞지만 이 정도로 힘든 건 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나는 굳이 그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정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지금은 이 팔목이나 마무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가는 걸 지켜보던 그녀가 문득 물었다.
"오늘 밤에 다시 나가야 하는데, 이 정도로 다 나은 건가요."
나는 흉터 하나 없이 매끄러워진 팔목을 확인하고서야 손을 뗐다. 손을 떼고 나서야 숨을 제대로 고를 수 있었는데, 그제야 그녀의 옷차림이 상처 치료를 받으러 온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걸 눈치챘다. 목 뒤로 넘긴 머리에는 작은 진주 장식이 달려 있었고, 드레스는 무도회에나 입을 법한 디자인이었으며, 손목에는 얇은 은팔찌까지 걸려 있었다. 이 정도면 붕대 감으러 온 게 아니라 무도회장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것 같은 차림이었다.
'데이트 복장 아닌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손님 사생활에 참견하는 건 진료사의 미덕이 아니라는 걸 이 바닥에서 오래 버티며 배운 몇 안 되는 교훈 중 하나였으니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살짝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다음에 또 신세 지게 될 것 같은데."
그 말이 그저 예의상 하는 인사인 줄 알았다. 나는 문을 닫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녀가 앉았던 의자를 멀거니 바라보았는데, 방금 있었던 일이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 * *
나는 그날 저녁 규진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 얘기를 꺼냈다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들었다.
규진은 국수를 후루룩 빨아들이다 말고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는데, 그 동작이 어찌나 극적이었는지 옆자리 손님이 흠칫 돌아볼 정도였다.
"라엘린 설잎이면, 이안 별해 경 파트너잖아. 오늘 둘이 만찬 약속 있다고 들었는데, 만찬 가다가 다쳤나 보네."
규진의 말에 나는 순간 젓가락을 멈췄다.
'만찬 상대가 이안이라고?'
나는 그녀가 왜 그런 화려한 옷을 입고 왔는지 그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살짝 무거워졌다. 별해 경이라면 나도 소문으로는 몇 번 들어본 이름이었다. 검술로도, 얼굴로도 사교계를 휘어잡는다는 그 남자와 라엘린이 나란히 서 있는 그림을 상상하니 왠지 입안이 텁텁해졌다.
"뭐 어때, 나랑 상관없는 얘기지."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국물을 떠먹었다. 규진은 그런 나를 빤히 보다가 장난스럽게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얼굴 좀 붉어졌는데? 라엘린 님 실물 영접하니까 심장이 남아나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나는 괜히 목소리를 높이며 시선을 피했는데, 그 반응이 오히려 규진에게 확실한 물증이 되어준 모양이었다. 규진은 세상 다 안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국수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을 꺼내는 순간, 방금까지 애써 눌러놓았던 그 무거움이 다시 뒤집혔다.
"그런데 웃긴 게, 그 만찬 오늘 새벽에 취소됐다던데?"
규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그 한마디에 나는 순간 국물을 삼키다 사레가 들렸다. 취소된 만찬에, 다친 팔목에, 그것도 무도회 복장까지. 세 가지가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부딪혔는데,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나는 그날 저녁 내내 알아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