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이준호, 맞지?" 백서아가 재차 확인하듯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반 아이들의 시선이 다시 우리 쪽으로 몰리는 걸 느끼며 목이 타는 듯한 긴장감에 휩싸였다. 도대체 왜 저 아이가 내 이름을, 게다가 이렇게 확신에 찬 말투로 부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엔 다른 선택이 없었다.
교실 안은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왁자지껄하던 아이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고 우리 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는데, 그 시선들이 하나같이 궁금함과 의아함, 그리고 약간의 부러움 섞인 눈빛이었다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국민적 아이돌이, 갑자기 전학 온 첫날부터, 반의 이름 없는 학생 하나를 지목해서 부르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맞는데… 왜?"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되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는 걸 느끼며 나는 책상 아래로 손을 슬쩍 감췄다. 이런 상황에서 손끝이 떨리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백서아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책상 위에 손을 짚었다. 그 짧은 동작 하나에도 주변 아이들이 숨을 죽이는 게 느껴졌는데, 그녀는 그런 시선들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처음 보는 거 아니잖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정말로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게 아니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국민적 아이돌과 내가 어디서 마주칠 일이 있었을 리 없었으니까.
내가 아는 백서아는 텔레비전 속에서, 혹은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수백만 명의 팬들을 거느린 존재였다. 그런 사람과 내가 개인적인 접점이 있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고,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아주 오래된 기억의 조각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초등학교 3학년, 그해 여름.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옆집에 낯선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유독 낯을 가려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나는 그런 아이가 혼자 놀이터 구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봤다.
땡볕이 내리쬐던 오후였다. 그날도 그 아이는 늘 앉던 그 자리, 미끄럼틀 아래 그늘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다 신나게 뛰어놀아도 그 애만은 항상 혼자였다.
'너도 혼자야?' 내가 그렇게 물었을 때, 그 아이는 고개만 끄덕였고, 나는 별생각 없이 그 옆에 앉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 특별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란히 앉아서 지나가는 개미를 구경하거나, 매미 소리를 듣거나, 가끔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는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여름이 끝날 무렵 그 아이는 갑자기 이사를 갔고, 나는 그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채 그 기억을 흐릿하게 묻어두었다. 어린 시절의 수많은 기억 중 하나로, 특별할 것 없는 조각으로.
"…설마." 나는 입술을 벌린 채 그녀를 바라봤다.
머릿속에서 흐릿했던 그 여자아이의 얼굴과 지금 눈앞의 백서아가 조금씩 겹쳐지려는 걸 느끼며, 나는 애써 그 연결을 부정하려 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 낯가리던 조용한 아이가, 지금 이렇게 온 국민이 다 아는 스타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으니까.
"기억나는 것 같은데?" 백서아가 눈을 살짝 접으며 웃었다. "그때 놀이터에서, 나한테 말 걸어준 애."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끝이 떨려오고 입술이 마르는 걸 느끼며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반 아이들은 우리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을 감지한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그 소음이 점점 커지는 와중에도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군가 뒤에서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쟤 뭐야, 백서아랑 아는 사이야?" 그 말에 나는 더 얼어붙었다. 이 순간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럴 리가, 라니. 나는 계속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살짝 서운한 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 표정이 진심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순간의 나는 그녀의 말에 저항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걸까. 상처받았다는 듯한 눈빛과, 그럼에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 그 두 가지가 어떻게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나올 수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수업이 다시 시작되기까지 남은 짧은 시간 동안, 백서아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내 곁에 붙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학교는 재밌는지, 친구는 많은지 하는 질문들이었는데, 나는 그 질문 하나하나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짧은 단답으로만 응할 뿐이었다.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일 때마다 은은한 향이 풍겨왔는데, 그게 방송에서 보던 화려한 모습과는 다른, 어딘가 익숙한 냄새처럼 느껴져서 나는 자꾸만 혼란스러워졌다.
"친구… 별로 없어."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았을 때, 그녀의 표정이 살짝 진지해지는 걸 느꼈다.
"그럼 나랑 친구 하자." 그녀가 불쑥 던진 말에 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 그게, 갑자기…" 나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국민적 아이돌이 나와 친구가 되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게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지 그 순간엔 미처 다 헤아리지 못했다.
이게 정상적인 상황인 걸까. 전학 온 첫날, 첫 시간도 아니고 쉬는 시간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다.
"갑자기가 아니야." 그녀는 단정하게 말했다. "나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 말투가 어딘가 서늘하게 다가와 나는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단순한 친절이라기엔 너무 확신에 차 있었고, 오랜만의 재회를 반기는 태도라기엔 지나치게 계산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십 년 가까이 지난 어린 시절의 인연을, 그것도 몇 개월 함께 놀았을 뿐인 옆집 아이를, 도대체 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수업 종이 울렸고, 백서아는 아쉽다는 듯 짧게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이 뒤엉킨 채로 남아 있었다.
종례가 끝나고 교실을 나서려는데, 백서아가 내 팔을 슬쩍 붙잡았다. 그 손길이 가벼운 듯하면서도 묘하게 힘이 실려 있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거." 그녀가 건넨 것은 접힌 종이쪽지였다. 열어보니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번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름 하나가 더 적혀 있었는데, 낯익은 필체는 아니었지만 어딘가 정성스럽게 눌러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 자주 보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난 이제부터 너한테 제일 먼저 연락할 거니까."
그 말이 단순한 친근함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선언처럼, 앞으로 나를 어떤 위치에 두겠다는 통보처럼 들려서, 나는 쪽지를 손에 쥔 채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 아이들이 하나둘 흩어지고, 교실 안에는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안의 쪽지가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 아이는 나에게서 뭘 원하는 걸까. 단순한 옛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그 답을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그날 이후로 내 일상이 결코 예전과 같을 수 없을 거라는 예감만을 안고 교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