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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그날 이후로도 나는 종종 그 웃음을 떠올렸다. 몇 명은 알아본 것 같다는 서연의 말에 채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던 순간,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씁쓸한 웃음. 술기운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그늘인 줄로만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표정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것이 단순한 부담감이 아니라 훨씬 더 무거운 무언가라는 걸 나는 며칠 뒤 채원에게서 직접 듣게 되었다. 결혼식이 있고 나서 일주일쯤 지났을까, 채원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는 사실 자체가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서연을 통해 번호를 주고받긴 했지만 설마 먼저 연락이 올 줄은 몰랐는데, 처음엔 그저 잘 지내냐는 형식적인 안부 정도이겠거니 했다. 짧은 메시지 몇 통이 오가는 동안에도 나는 몇 번이고 휴대폰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며 이게 정말 그 채원이 맞나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는데, 대화는 어느새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는 얘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약속 장소로 가는 내내 나는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유명 배우와 단둘이 만난다는 사실 때문인지, 아니면 그날 결혼식에서 봤던 그 표정 변화가 계속 마음에 걸려서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카페 문을 열기 직전까지 손끝이 조금 차가웠던 것만은 분명했다. 카페에 도착했을 때, 채원은 이미 구석 자리에 앉아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 자리를 피해 일부러 안쪽 깊숙한 테이블을 골라 앉은 것 같았는데, 그런 사소한 배치 하나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인지가 짐작이 됐다. 술기운이 완전히 빠진 맨정신의 그녀는 결혼식 날과는 또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표정도 말투도 훨씬 차분하고 신중했으며, 그날의 거침없던 매력 대신 조심스러운 경계가 눈빛에 서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도 거의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고, 그녀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카페 입구 쪽을 살피는 듯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해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뭘요?" "그날 밤 얘기, 도윤 씨 주변에 얼마나 퍼졌어요?" 그 질문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딱히 퍼뜨릴 만한 얘기도 없었고, 서연에게조차 자세히 말하지 않았던 터라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는데요." 채원이 잠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믿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 시선이 꽤 길게 이어지는 바람에 나는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저 눈빛은 뭘까, 의심인 걸까, 아니면 그냥 습관적인 경계인 걸까. 나는 그 표정을 보며 오히려 억울한 기분이 들어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예요. 저 그런 거 이야기하고 다닐 정도로 한가하지도 않고, 애초에 뭘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잖아요." 그 말에 채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렸다.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표현이 그녀에게 예상 밖이었는지, 그녀는 잠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낮게 웃었다. 손가락 끝으로 잔의 테두리를 한 바퀴 돌리는 그 동작이 어쩐지 긴장을 풀어내는 그녀만의 버릇처럼 보였다. "보통은 자랑하고 싶어 하던데." "저는 딱히…" 나는 말끝을 흐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술자리에서 재밌는 사람 만난 정도로 기억하고 있어서요." 재밌는 사람이라는 말에 채원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유명 배우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실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어서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카페 안에는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그 선율 사이로 잠깐의 침묵이 끼어들었다. "근데 왜 그렇게 걱정하는 거예요? 소문나면 안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 질문에 채원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그녀는 잠시 창밖을 응시하다가, 마치 오래 눌러왔던 말을 꺼내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창밖으로는 사람들이 무심히 오가고 있었는데, 그녀의 시선은 그들 중 누구도 아닌 먼 곳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지금 준비하는 작품이 있는데, 이미지가 되게 중요한 역할이거든요. 근데 스캔들 하나 터지면,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캐스팅부터 흔들려요." 소속사, 이미지, 캐스팅. 나로서는 낯선 단어들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무게만은 확실히 전해졌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봤던 그 거침없고 자유로운 모습 뒤에, 이렇게까지 조심해야 하는 현실이 있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웃던 사람이 지금은 카페 구석에서 모자를 눌러쓴 채 이렇게 작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럼 저랑 이렇게 만나는 것도 문제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죠."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인정했다. "근데 이상하게, 도윤 씨는 그냥 만나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빛에 잠깐이나마 무장해제된 순간이 스쳤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는데, 손끝에 닿는 잔의 온기가 그나마 나를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채원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덧붙였다. "그래도 조심은 해야 해요. 사람들 눈이 생각보다 많거든요." 그녀의 말이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심성이라는 걸 그 어조에서 느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어봤길래 저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할게요. 근데 진짜 저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알아요, 믿어요." 그녀가 짧게 대답하며 옅게 웃었다. 그 웃음이 조금 전보다는 훨씬 편안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휴대폰이 테이블 위에서 짧게 진동했다. 진동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던 건 그 순간 카페 안이 잠시 조용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그 소리에 예민해져 있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채원이 화면을 확인하는 순간 얼굴빛이 눈에 띄게 굳었고, 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채원은 대답 대신 휴대폰 화면을 나에게 슬쩍 보여줬다. 매니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어제 결혼식 사진 몇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는데, 거기 너도 같이 찍혔어. 확인해봐."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걸 느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심하면 된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했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내 목소리가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상황은 이미 내 손을 떠나 있었다. 어째서 하필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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