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회귀했더니 짝사랑이 있었다니

2화

회사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는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 있었다. 로비의 대리석 바닥, 엘리베이터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의 얼굴, 심지어 안내 데스크 직원의 인사 멘트까지 나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 그 익숙함이 오히려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회전문을 밀고 들어설 때 느껴지는 서늘한 에어컨 바람, 로비 한쪽에 걸린 액자 속 사훈, 심지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순서까지도 나는 손이 저절로 움직일 만큼 익숙했다. 이게 정말 다시 시작된 거라면,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발걸음은 이미 그때와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방향으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에 외운 대본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되고, 강당에 신입사원들이 하나둘 모여 앉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낯익은 얼굴들을 하나씩 짚어보았다. 누구는 아직 어색하게 명찰을 만지고 있었고, 누구는 벌써 옆자리와 명함을 주고받으며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 모든 풍경이 3년 전의 그날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아서 나는 자꾸만 숨을 고르게 삼켜야 했다. 그리고 그중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강태민을 발견했을 때, 나는 반가움과 동시에 묘한 서글픔이 밀려왔다. 3년 전 이 시점에서, 태민은 아직 나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저 낙천적인 웃음, 옆자리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며 분위기를 풀어내는 그 모습이 그대로였다. 나중에 그가 내 가장 가까운 동기가 되고, 내가 무너질 때마다 옆을 지켜줄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그는 지금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강당 앞에 선 인사팀 직원이 마이크를 두드리며 오리엔테이션 시작을 알렸고, 나는 그 목소리마저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대로라는 사실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도대체 왜, 하다못해 목소리 톤까지 똑같은 걸까. "저기, 혹시 이도현 씨 아니세요?"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명찰을 보며 태민이 다가와 물었을 때,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 대화, 이 순서, 심지어 그가 짓는 표정까지도 전에 겪었던 것과 똑같았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는 각도, 명찰을 확인하려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 타이밍, 그 모든 게 마치 필름을 되돌려 보는 것 같아서 나는 순간적으로 현실감을 잃을 뻔했다. "…네, 맞는데요." 내가 대답하자 그는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저는 강태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3년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날 저녁, 신입 동기들끼리의 첫 회식 자리가 잡혔다. 삼겹살집의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조용히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태민이 계속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분위기를 이끄는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자꾸 무거워졌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타는 소리, 누군가 건배를 외치는 소리,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들이 뒤섞여 시끌벅적했지만, 나는 그 소음 속에서도 이상하게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이 사람들 중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 누가 나를 지켜줄 사람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기 저 사람은 반년 뒤 나를 배신하고 팀장에게 내 실수를 부풀려 보고할 사람이었고, 저 옆에 앉아 조용히 소주를 따르는 사람은 결국 회사를 떠나 다시는 연락이 닿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 구석에서 조용히 물잔을 채워주며 사람들을 챙기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서윤아. 검은 숏봅 머리에 작은 체구, 말없이 남들 접시가 비면 슬쩍 반찬을 옮겨주는 손길이 유난히 눈에 밟혔는데,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 가슴이 저릿해졌다. 그녀는 자기 접시보다 옆 사람의 접시를 먼저 채우는 사람이었고, 누군가 잔이 비면 소리 없이 다가가 술을 따라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정작 대화의 중심에 서는 법이 없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사람 같은데.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일 텐데도, 나는 그녀의 손짓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으로 파편처럼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있었다. 아, 맞다. 첫 번째 인생에서, 내가 야근에 지쳐 있을 때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그 아이스커피. 얼음이 다 녹기 전에 마시라는 짧은 메모 한 장 없이, 그저 조용히 놓여 있던 그 커피가, 누가 놓고 갔는지 끝내 알아내지 못했던 그 커피가, 사실은 그녀였다는 걸.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럴 리가. 그때는 그저 우연히 누군가 배려해준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서윤아의 얼굴을 보며 나는 확신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였다.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두 번째 인생이 되어서야, 이렇게 뒤늦게 알아차리고 있었다. "저기, 이도현 씨죠?"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을 때, 나는 그 목소리마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손끝이 떨려왔다. 목소리의 높낮이, 말끝을 살짝 흐리는 습관, 그 모든 게 기억 속에 있던 그대로였다. "아, 네. 서윤아 씨…" 명찰을 확인하며 대답하자 그녀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차, 나는 순간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둘러댔다. "아, 명찰 보고 말한 거예요." 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옅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나는 이상하게 목이 탔다. 첫 번째 인생에서 나는 그녀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말 한 번 하지 못했다. 그저 소은에게만 매달려 있느라, 곁에서 조용히 응원해주던 사람의 존재조차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거였다. 그녀가 몇 번이나 내 자리 근처를 지나쳤는지, 몇 번이나 나를 향해 무언가 말을 걸려다 삼켰는지, 나는 그때는 전혀 몰랐다. 이번엔 다를 수 있을까. 이번엔 정말로, 그녀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회식이 끝나고 다들 흩어질 무렵, 태민이 내 옆에 다가와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야, 표정이 왜 그래?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함께 은근한 걱정이 섞여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익숙해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아니야, 그냥." 나는 애써 웃으며 대답을 피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게 정말로 다시 시작된 인생이라면, 나는 이번엔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생각. 소은에게 매달리다 파국을 맞았던 그 결말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 그리고 저 멀리 앞서 걸어가는 서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밤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데도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서 그녀가 사라진 골목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이 두 번째 삶에서 그녀와의 관계를 다르게 써 내려갈 수 있다면, 나는 어디서부터 무엇을 바꿔야 하는 걸까. 그리고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생각 하나가 스쳤다. 만약 이 삶에서 내가 무언가를 바꾸는 순간,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시간의 궤도마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버린다면. 그렇게 되면 나는, 지금 알고 있는 그 어떤 미래도 더 이상 확신할 수 없게 되는 게 아닐까.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