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회귀했더니 짝사랑이 있었다니

1화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이렇게까지 크게 들릴 수 있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하얀 도자기 조각들이 카페 바닥에 흩어지며 내던 소리는 마치 내 안의 무언가가 함께 부서지는 소리 같았는데, 소은은 그 조각들을 내려다보지도 않은 채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미안함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섞여 있지 않아서, 오히려 내가 우스운 소리를 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종업원이 다가와 조심스레 조각들을 치우기 시작했지만, 소은은 그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나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빠, 나 이제 오빠 못 봐줄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고, 나는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끼면서도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랐지만, 이미 갈라져 나온 뒤였다. 소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고, 그 손짓 하나에서마저 나는 이미 끝났다는 걸 직감했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는 그녀의 눈짓, 마치 이 대화가 얼마나 더 지속될지를 재는 듯한 그 태도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럴 리가. 3년을 만났는데, 3년을 버텨왔는데 이렇게 끝나버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처음 만났던 봄날의 벚꽃잎이 스치던 순간부터, 함께 웃고 다투고 다시 화해하던 그 모든 계절들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지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의 입술이 다음에 무슨 말을 뱉을지 기다릴 뿐이었다. "나 사실… 좋아하는 사람 있어." 그 한마디에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고, 곧이어 그 상대가 누구인지를 물으려던 참에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준서. 회사 다른 부서 사람, 몇 번 술자리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의 이름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나는 끝내 삼켰다. 그날 술자리에서 소은이 그를 바라보며 지었던 웃음, 평소보다 조금 더 길게 이어졌던 그 웃음을 나는 애써 모른 척했었다는 걸, 이제서야 뒤늦게 깨달으며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왜, 도대체 왜 하필 지금, 내가 청혼까지 생각하고 있던 이 시점에. 나는 손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었고, 소은은 그런 나를 보면서도 조금의 죄책감도 내비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가방끈을 어깨에 걸치는 그 자연스러운 동작이,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준비해온 사람 같아서 나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미안해."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붙잡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는데도, 나는 그 짧은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그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카페를 나서고 나서도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울의 밤공기는 차가웠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는데, 나는 그 모든 소음 속에서 홀로 멈춰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아스팔트 위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위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조차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3년이라는 시간이, 그 모든 순간들이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릴 거였다면, 나는 애초에 왜 그렇게 애를 썼던 걸까. 후우, 하고 짧게 숨을 내뱉으며 나는 걸음을 옮겼다. 집에 돌아와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지난 3년을 곱씹었는데,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녀가 웃던 모습, 함께 여행을 갔던 기억까지 하나하나 떠올릴수록 가슴이 답답해져 숨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마저 그날따라 유독 크게 느껴졌고, 나는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끌어당겼다가 다시 걷어차기를 반복했다. 결국 나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채 뒤척이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느꼈다. 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듯한 감각,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워지는 느낌이 이어지더니, 나는 그대로 의식을 놓아버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천장을 보고 있었다. …아니, 낯선 게 아니었다. 익숙했다. 지나치게 익숙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좁은 원룸의 구조, 벽에 붙어 있는 달력, 그리고 그 달력에 적힌 날짜를 보는 순간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입사 첫날.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 그럴 리가. 나는 벌떡 일어나 휴대폰을 확인했고, 화면에 뜬 날짜를 보고 또 봤지만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3년 전, 정확히 그날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손끝이 떨려와 휴대폰을 제대로 쥐고 있기도 힘들었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나는 게 느껴졌고, 나는 그 축축한 감촉이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만들어 더욱 소름이 돋았다. 이게 꿈인가, 아니면 내가 미쳐버린 건가. 나는 몇 번이고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옷장에 걸려 있는 그날 입었던 정장도 모든 게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현실이었다. 방 안의 냄새마저, 그 시절 즐겨 쓰던 섬유 세제 향기까지 정확히 기억 속의 그것과 같아서,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어째서… 왜 하필 이 시점으로.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3년이라는 세월이, 소은과의 그 모든 기억들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사라져버린 걸까. 아니면 그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걸까. 나는 답을 알 수 없는 물음들 속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창문 밖으로 낯익은 골목이, 3년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편의점 간판이 그대로 걸려 있는 걸 보면서, 나는 이것이 착각도 환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한 가지 확신에 가까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만약 이게 진짜로 다시 시작되는 거라면, 나는 이번엔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 소은에게 다시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것. 이번 인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르게 살아내겠다는 것. 절대 안 돼. 두 번은. 나는 주먹을 말아쥐며 그렇게 되뇌었다. 그리고 그 다짐 뒤편으로, 오늘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마주칠 얼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유독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다시 다른 방식으로 쿵쾅거리는 걸 느끼며 스스로도 당황스러워졌다. 출근 준비를 하며 옷장을 여는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3년 전 그날 그대로였는데, 나는 그 낯익은 얼굴을 보면서도 왠지 모르게 낯선 위화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넥타이를 매려다 세 번이나 다시 풀어야 했고, 셔츠 단추를 잘못 채워 처음부터 다시 채워야 했다. 손끝이 이렇게까지 서투르게 느껴진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오늘, 정확히 오늘 오후에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 회식 자리에서, 그 사람과 처음 눈이 마주치던 순간이 있었다는 걸. 그 순간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두려움과 알 수 없는 기대감 사이에서 흔들리게 만들고 있었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3년 전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웃으며 이 계단을 내려갔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던 모든 배신과 절망을 이미 알고 있는 채로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건물을 나섰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불안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말로 다르게 살아낼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이 모든 게 정말로 현실이긴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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