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계단을 내려오는 걸음은 느렸는데, 그 느림이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을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구두 굽이 대리석 위에서 내는 소리마저 규칙적이라, 마치 무대 위에서 정해진 동선을 밟는 배우처럼 보였다. 검은 슈트의 여자가 홀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는 순간, 방금까지 지안을 둘러싸던 웃음소리들이 마치 스위치가 꺼진 듯 일순 사라졌다. 조명 아래 부유하던 먼지 입자들조차 그 순간엔 움직임을 멈춘 것 같았다.
차이현이었다. 면접실에서 마주쳤던 갈색 눈동자가 지금은 어딘가 더 짙게, 더 위압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는 서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채였지만, 지금은 그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 지안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차 대표님." 지안의 팔을 붙잡고 있던 여자가 손을 슬며시 놓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서두르는 기색이 느껴졌다. "인간 하나가 초대 없이 들어와서요, 그냥 좀 놀아주려던 것뿐이에요."
"놀아주려던 게 그 얼굴을 하고 있진 않던데." 차이현이 지안 앞으로 다가서며 짧게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눈이 지안의 손목에 남은 손자국을 확인하는 데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시선이 지나간 자리마다 온도가 남는 것 같았는데, 지안은 그것이 손자국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괜찮아요?"
지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입술을 떼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었고, 그 기분의 정체를 설명할 자신도 없었다.
"여긴 초대받은 손님만 들어오는 곳이에요." 차이현이 지안에게 낮게 말했다. 그 목소리엔 다른 이들에게 쓰던 것과는 다른 온도가 실려 있었는데, 지안은 그 미묘한 차이를 눈치챌 여유조차 없었다.
"몰랐어요. 그냥... 아무 데나 걷다가."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예요?"
지안이 답하지 못하는 사이, 차이현이 주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사람들이 조용히 눈을 피했다. 누군가는 술잔을 내려놓았고, 누군가는 이미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홀 전체가 하나의 생물처럼 그녀의 시선을 피해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오늘은 다들 일찍 자리 정리해." 차이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명령이었다. "내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곳이라면, 나도 더 이상 여기 발을 들일 이유가 없으니까."
짧은 침묵 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발소리들이 겹쳐지며 빠르게 홀 바깥으로 흩어졌다. 지안을 붙잡았던 여자도 시선을 피하며 서둘러 홀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차이현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
차이현은 지안을 클럽 뒤쪽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벽면 가득 걸린 오래된 그림들이 낮은 조명 아래 색이 죽은 채 걸려 있었는데, 그 정적인 분위기가 방금까지의 소란과는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앉아요." 차이현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안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고, 소파의 가죽이 차가운 감촉으로 손바닥에 닿았다. 차이현은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지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면접 때 봤던 얼굴인데." 차이현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런 곳에서 다시 볼 줄은 몰랐네요."
"저도... 여기서 대표님을 다시 만날 줄은 몰랐어요."
"떨어뜨린 거, 원망하나요?"
"조금은요." 지안이 짧게 웃었다. 웃음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근데 맞는 말이었으니까."
"뭐가 맞는 말이었는데요."
"확신 없다는 거요."
차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테이블 위 유리병에서 물을 따라 지안 앞에 놓아주었다. 유리병 표면에 맺혀 있던 물기가 손끝을 타고 흘렀다. 그 손끝이 지안의 손등을 아주 짧게 스쳤는데, 그 온도가 이상하게도 클럽 안 다른 사람들의 손과는 전혀 다른 종류로 느껴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어딘가 낯선 온도였다.
"당신, 여기가 무슨 곳인지는 알고 들어온 거예요?"
"아니요. 그냥 문이 열려 있어서."
"문이 열려 있다고 다 들어가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차이현이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마저 낮고 짧아서, 마치 실수로 흘려버린 감정 같았다. "위험한 걸 못 알아보는 건가, 아니면 위험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안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손끝으로 물잔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유리 표면에 비친 조명이 흔들리는 것을, 지안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림, 원래 그렸다고 했죠." 차이현이 화제를 바꿨다. "이력서에 있던 학교, 거기 나온 사람 중에 아는 이름이 있던데."
"누구요?"
"한재우."
지안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오래전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각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캔버스 냄새, 유화 물감이 마르는 소리, 그리고 그 앞에서 자신이 그림을 포기하겠다고 말했을 때 스승이 지었던 표정.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그만두는 거잖아." 그때 한재우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지안은 알 수 없었다.
"제 스승이었어요. 지금은... 연락 안 하고 지내요."
"왜요?"
"그만뒀으니까요. 그림도, 그 사람과의 연락도."
차이현은 그 대답을 한참 곱씹듯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지나치게 오래 머문다는 걸 지안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방 안의 정적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게, 지안은 낯설었다.
"오늘은 데려다줄게요." 차이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슈트 자락이 소파 끝을 스치며 옅은 소리를 냈다. "이런 곳에 다시 혼자 오지는 말고요."
"왜 저를 도와주신 거예요?"
차이현이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뒤돌아본 그녀의 눈동자가 조명 아래 잠깐 다른 색으로 번쩍인 것 같았는데, 지안은 그것이 착각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방 안의 그림들이 그 순간만큼은 색을 되찾은 듯 보이기도 했다.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네요."
그 말을 남기고 차이현은 먼저 문을 나섰고, 지안은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뒤늦게 따라 걸음을 옮겼다. 복도의 조명이 차이현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는데, 그 그림자가 지안의 발끝까지 닿을 듯 말 듯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