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야연에서, 그림자를 그리다

1화

면접실 조명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형광등이 아니라 매립형 LED였는데도, 그 빛은 어딘가 인공적으로 하얗기만 해서 사람의 피부색조차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서지안은 무릎 위에 놓인 포트폴리오를 다시 한번 손끝으로 매만졌다. 표지의 모서리가 이미 여러 번 접혔다가 펴진 흔적으로 하얗게 일어나 있었고, 그 안에 든 그림들이 여전히 자신의 것인지 스스로 의심하는 표정을 지안은 끝내 감추지 못했다. 음영테크 본사 32층, 유리로 된 벽면 너머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오후의 햇빛이 미세먼지 낀 하늘을 통과하며 빛을 흩뜨렸고, 그 풍경을 등지고 앉은 여자는 명함에 적힌 이름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차이현. 짧게 자른 흑발 아래로 드러난 눈동자는 갈색이었는데, 그 색이 지나치게 균일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지안은 지우지 못했다. 마치 렌즈를 낀 것처럼, 혹은 애초에 사람이 아닌 것처럼. "서지안 씨." 차이현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낮게 입을 열었다. 손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이력서에는 미술 전공이라고 되어 있는데, 자기소개서에는 그 얘기가 한 줄도 없네요." "그건... 지금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서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숨기고 싶었던 거겠죠." 지안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차이현의 목소리에는 억양의 굴곡이 거의 없었는데, 그 평평함이 오히려 상대의 속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는 도구처럼 느껴졌다. 마치 감정을 가늠할 수 없는 저울처럼, 어떤 무게를 올려놓아도 늘 같은 지점에서 멈춰 서는. "당신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불편하죠." 차이현이 펜을 손끝으로 굴리며 말을 이었다. 펜 끝이 손가락 사이를 빠르게 오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반복됐다. "기술 기업에 지원한 이유가 적성이 아니라 생계라는 게, 이 질문지 어디에도 안 쓰여 있지만 다 보여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문제는 아니죠. 하지만 우리 회사가 원하는 건 절박함이 아니라 확신이에요." 차이현은 서류를 덮으며 자리에서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녀의 그림자가 책상 위로 길게 늘어졌다가, 조명의 방향이 바뀌듯 다시 짧아졌다. "확신 없는 사람을 뽑으면, 그 사람도 우리도 시간을 낭비하게 되니까." 지안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맴돌았지만, 그것을 소리로 꺼내는 순간 더 초라해질 것 같아서 삼켰다. "그럼 대표님은," 지안이 겨우 입을 열었다. "확신이 있어서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건가요?" 차이현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지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시선에는 놀람도, 불쾌함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관찰하는 듯한, 표본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건 지원자님이 신경 쓸 부분은 아니죠." 차이현이 짧게 답했다. 목소리의 온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창밖의 구름이 유리에 비쳐 차이현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가 지나갔고, 그 그림자가 지나가는 속도만큼 지안의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들렸다. "면접은 여기까지 하죠." 차이현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을 스치며 짧게 마찰음을 냈다. "결과는 메일로 갈 거예요. 아마 좋은 소식은 아닐 겁니다." 지안은 그 말이 던져지는 순간, 이상하게도 안도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거절당했다는 사실보다,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의 속을 정확히 읽어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포트폴리오를 챙기는 동안, 지안은 차이현의 얼굴을 다시 한번 훔쳐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지안의 손목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유리 벽 너머로 층수가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를 바라보던 지안은 왼쪽 귀에 꽂힌 이어폰형 단말기를 톡 건드렸다.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면접 시간 47분. 예상보다 12분 일찍 끝났네요." 라온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감정이 없는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사람을 놀리는 톤을 품고 있었다. "떨어진 거죠?" "...말 안 해도 알잖아." "알죠. 근데 확인하는 재미가 있어서요." "넌 재미도 참 이상한 데서 찾는다." "제가 찾을 수 있는 재미가 몇 개 없어서요." 지안은 대답 없이 건물 로비를 빠져나왔다. 회전문을 통과하는 순간 실내의 인공적인 온기가 사라지고, 늦가을 바람이 옷자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 서늘한 감촉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손목의 단말기가 다시 진동했다. 이번엔 어머니였다. "면접 어떻게 됐니." 윤미경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질문보다는 확인처럼 들렸다. 지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아직 결과 안 나왔어요." "결과가 안 나온 게 아니라, 네가 또 자신 없이 굴었겠지. 그 표정으로 무슨 면접을 보겠다고." "엄마." "이번 달 카드값 네 몫으로 얼마나 나왔는지 알아? 그림 그리겠다고 관두고 이렇게 살 거면, 그때 절에 가서 스님한테 물어봤어야지. 니 팔자에 예술이 맞는지." 지안은 걸음을 완전히 멈춰 섰다. 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동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짧게 깨물었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었지만 지안의 발은 인도 위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엄마, 나 오늘 좀..." "들어가서 밥 먹어라. 냉장고에 반찬 넣어놨으니까." 통화가 끊겼다. 지안은 단말기 화면에 뜬 종료 표시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조금 전보다 무거워진 것 같았지만, 그게 신발 때문인지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분이 별로인 것 같은데요." 라온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니, 괜찮아." "괜찮다는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낮게 깔려 있는 건 처음 듣는데요." "...넌 그런 것까지 다 분석해?" "그게 제 일이니까요. 근데 이번엔 분석 안 해도 알겠어요." 지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구름 사이로 스며든 노을빛이 유난히 붉게 번지고 있었다. 마치 오늘 하루가 통째로 타버린 것처럼. 지안은 그 붉은빛을 눈에 담으며, 문득 자신의 하루도 저렇게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 집으로 돌아온 지안은 현관에 들어서기도 전에, 신발장 위에 놓인 오래된 스케치북을 발견했다. 몇 년째 펴보지 않은 것이었다. 표지 색이 이미 누렇게 바랬고, 모서리는 습기 때문에 살짝 말려 있었다. 손끝으로 표지를 쓸어보는데, 먼지가 옅게 일어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그 가루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잠깐 반짝였다가, 곧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지안은 스케치북을 펼쳐보지 않았다. 펼치면 안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스무 살의 자신이 그렸던 것들. 지금의 자신이 보기엔 서투르지만, 그때는 온 마음을 다해 그렸던 것들. "그림 그리는 게 그렇게 좋으면, 계속해봐. 근데 밥은 내가 안 사줄 거야." 어머니가 예전에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지안은 스무 살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조금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아니,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확신에 찬 사람이었고, 지안은 언제나 그 확신 앞에서 작아지는 사람이었으니까. 스케치북을 다시 신발장 안으로 밀어넣으며, 지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발장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오늘 밤에도 이력서를 고쳐야 했다. 내일 아침엔 또 다른 면접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동안, 지안은 문득 오늘 면접실에서 차이현이 던진 질문들을 다시 떠올렸다. 확신. 그 단어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무엇에 확신이 있었던 적이 있었나. 그림을 그릴 때조차, 확신이 아니라 그저 좋아서 붓을 들었던 것뿐인데. 손목의 단말기가 다시 진동했다. 발신자는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음영테크 인사팀입니다. 서지안 님, 이번 채용에는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예상했던 결과였는데도, 그 문장을 확인하는 순간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는 걸 지안은 막을 수 없었다. 화면의 불빛이 어두운 방 안에서 유난히 밝게 도드라졌고, 지안은 그 빛을 한동안 그대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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