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태오의 저택은 크고 조용했는데, 그 조용함이 도윤에게는 안온함이 아니라 숨죽인 감시처럼 느껴졌다.
높은 천장과 두꺼운 벽, 발소리를 삼켜버리는 카펫까지, 모든 것이 이 저택의 주인이 얼마나 신중하고 폐쇄적인 인물인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골목에서 있었던 일 이후로 태오는 도윤을 자신의 집 별채에 머무르게 했고,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그저 "당분간 여기 있으시오."라는 짧은 한마디만 남긴 채 발길을 돌렸다.
그 말투가 명령인지 배려인지 도윤은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짧고 무뚝뚝했지만, 어딘가 도윤의 안전을 염두에 둔 것 같은 여운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하필 나를.' 도윤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별채의 방 안을 서성였다.
도윤은 이 몸에 남은 기억을 통해 자신이 이 세계에서 고아로 자라 태오 저택의 관리인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살아온 처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기억 속에서도 태오가 이렇게 직접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기억은 흐릿하고 조각난 필름처럼 끊겼다가 이어지곤 했는데, 그 조각들을 이어붙여도 태오라는 인물은 늘 멀리서 지나치는 그림자에 가까웠다.
'왜 갑자기.' 도윤은 방 안을 둘러보며 손끝으로 침대보의 결을 만지작거렸는데, 부드러운 감촉과는 별개로 마음 한구석이 계속 서늘했다. 방은 넓고 깨끗했으며, 창가에는 작은 화병에 하얀 꽃이 꽂혀 있었는데, 그 정갈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세심하게 무대를 꾸려놓은 것 같아서, 도윤은 그 배려의 이면에 숨은 의도를 자꾸 헤아리게 되었다.
저녁이 되어 별채로 식사가 들어왔을 때, 도윤은 시중을 드는 하녀의 눈빛에서 이상한 조심스러움을 읽었다. 하녀는 그릇을 내려놓으며 도윤을 향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고,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그 미묘한 회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윤은 곧 깨달았다. 이 저택에서 남자인 자신이 태오의 방 근처에 머무는 것 자체가 이미 이상한 소문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것을.
"필요한 거 있으시면 종을 울리세요." 하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방을 나갔는데, 그 걸음이 너무 빨라서 마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처럼 보였다. 도윤은 그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뭐라고.' 그저 하룻밤 묵는 것뿐인데, 이 저택 전체가 자신을 이상한 존재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속이 답답했다.
식사를 마친 뒤, 도윤은 그릇을 내주기 위해 복도로 나섰다가 지나가던 태오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태오는 그를 보자마자 걸음을 늦추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가 문득 멈춰 섰다. 복도의 등불이 태오의 옆얼굴을 비추었는데, 그 각진 턱선과 곧게 뻗은 콧날이 마치 조각상처럼 완벽해서, 도윤은 순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그쪽 방은 불편한 게 없소."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처럼 던진 말이었고, 도윤은 그 말투의 무뚝뚝함 속에 숨은 배려를 느꼈지만, 동시에 태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목덜미쯤에 머무는 걸 눈치채고 순간 몸이 굳었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서 도윤은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괜, 괜찮습니다."
도윤이 겨우 대답을 짜냈을 때, 태오의 눈매가 살짝 굳어지는 것이 보였는데, 그것은 마치 도윤의 말투나 몸짓 어딘가에서 불쾌한 무언가를 읽어낸 사람의 표정 같았다. 도윤은 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고, 순간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한 건 아닌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되짚어보았다. 목소리가 너무 떨렸던가, 시선을 너무 오래 마주쳤던가.
'혹시.' 도윤은 그 순간 이 세계의 기억 속에서 흘러나온 정보 하나를 떠올렸다. 태오가 동성애를 극도로 혐오한다는, 저택 하인들 사이에 퍼진 은밀한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부엌 뒤편에서, 세탁장 구석에서, 낮은 목소리로 오갔던 것이었는데, 누구도 태오 앞에서는 감히 그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 생각이 스치자 도윤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는데, 자신이 지금 이 세계에서 맡은 역할이 또다시 게이 남성이며, 게다가 하필 그 상대가 동성애혐오를 지닌 남자라는 사실이 지독하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천 개가 넘는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하필 또 이런 배역이라니.' 도윤은 헛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이건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골라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태오는 도윤의 굳은 표정을 잠시 응시하다가, 별다른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는데, 그 뒷모습이 남기고 간 침묵이 도윤의 심장을 서늘하게 조여왔다.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도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저 사람은 나를 위험한 걸로 보는 걸까, 아니면 불결한 걸로 보는 걸까.' 도윤은 그 경계가 어디쯤인지 가늠할 수 없어 방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방문을 닫고 등을 기댄 채 잠시 눈을 감았는데,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도윤은 창가에 앉아 저택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달빛 아래 다듬어진 나무들이 마치 무대 세트처럼 정갈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오히려 도윤을 더 외롭게 만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은빛 달빛이 마치 조명처럼 정원 전체를 비추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너무 완벽해서 도윤은 이곳이 진짜 세계인지, 아니면 잘 짜인 세트장인지 다시금 헷갈렸다.
'천 개가 넘는 세계를 돌았는데, 여기서도 결국 나는 배우일 뿐이구나.' 도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즉 태오라는 남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위태로운 조연의 자리를 곱씹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대본도 없이 던져진 무대 위에서, 관객도 없이 홀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게 이렇게 외로운 일이었나. 도윤은 창틀에 팔을 기대고 턱을 괸 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때 정원 저편에서 그림자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는데, 태오였다. 그는 홀로 정원을 거닐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고요하고 쓸쓸해서, 도윤은 순간 그가 이 세계의 남주인공이라는 사실도,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그저 창문에 이마를 대고 그를 지켜보았다.
태오의 걸음은 느렸고, 어디에도 목적지가 없어 보였다.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정원을 배회하는 것 같았는데,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커다란 등이 달빛 아래서 유독 외로워 보여서, 도윤은 저 사람도 자신처럼 이 세계에서 이방인처럼 느끼는 순간이 있는 걸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혼자 있을까.' 도윤은 태오의 정략적인 약혼자 한소라의 존재를 이 몸의 기억 속에서 떠올렸는데, 3년 전에 정해진 약혼이라는 것치고는 태오의 정원 산책에 그 어떤 애정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아서, 그 쓸쓸함이 오히려 도윤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약혼자가 있는데도 이토록 혼자인 밤을 보내는 남자라니. 도윤은 그 모순이 어딘가 낯익은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지켜보다가, 도윤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뒤늦게 자각했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경계해야 할 상대를, 자신을 불결하게 볼지도 모르는 남자를, 이렇게 창문에 이마를 붙이고 훔쳐보고 있다니. 도윤은 황급히 커튼을 닫았지만, 어둠 속에서도 태오의 쓸쓸한 뒷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다음 날 아침, 도윤은 저택의 시중을 들라는 지시를 받고 처음으로 태오의 서재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데, 그 방 안에 가득한 책과 서류들 사이에서 낯선 편지 한 장을 발견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서재 안은 종이와 잉크 냄새, 그리고 어딘가 나무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는데,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편지 하나가 유독 도윤의 눈길을 붙잡았다. 봉투에 찍힌 낯선 인장이,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이름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