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쌤, 지금 유혹하시는 거죠?

5화

수업이 끝나고 나는 곧장 정문 앞으로 나갔다. 가방을 다시 고쳐 메는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오늘 아침 받았던 그 문자 한 통 때문이었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냥, 끝나고 정문 앞에서 기다리라는 짧은 말뿐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문장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도, 급식을 먹을 때도, 나는 계속 그 문장을 곱씹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는 가로등만 몇 개 켜져 있었다. 하나는 깜빡거렸고, 하나는 아예 꺼진 채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지나가는 학생들 몇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이 시간에 정문 앞에 혼자 서 있는 게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나는 괜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하며 시선을 피했다. 십 분쯤 지났을까, 검은 세단이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엔진음이 낮게 울렸다. 창문이 내려갔다. 한서은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 화장은 평소보다 옅었고, 머리는 하나로 묶어 올린 상태였다. 학교에서 볼 때와는 조금 다른 인상이었다. "타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수석에 올라탔다. 문을 닫는 순간, 바깥 소음이 뚝 끊겼다. 차 안은 은은한 향수 냄새로 가득했다. 그 향은 처음 버스에서 맡았던 그 냄새와 똑같았다. 그날 그 좌석, 그 순간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이 냄새가 누구의 것인지도 몰랐는데. "어디 가는 거예요." "가보면 알아요." 그녀는 짧게 대답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라디오에서 낮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잘 알지 못하는 곡이었다. 나는 창밖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서 무릎 위에 얹었다가, 다시 옆으로 내렸다가, 결국 그냥 주먹을 쥐었다. 차는 시내를 벗어나 해안도로로 이어졌다. 창문 틈으로 짠 냄새가 섞인 바람이 들어왔다. 가로등이 뜸해지고, 도로 옆으로 검은 바다가 펼쳐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유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이 푸르게 빛나는 건물이었다. 수족관이었다. "여기, 아직 문 열었어요?" "오늘 야간개장이에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는 함께 걸어 들어갔다. 그녀와 나란히 걷는 게 낯설었다. 발걸음의 속도를 맞추는 것도, 그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는 것도 전부 처음 겪는 일 같았다. 입구에서 그녀가 티켓 두 장을 내밀었다. 이미 예매해둔 것 같았다. 직원이 티켓을 확인하며 나를 한 번 힐끔 쳐다봤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 애썼지만, 등 뒤로 땀이 배어 나오는 걸 느꼈다. 안으로 들어서자 거대한 수조가 눈앞에 펼쳐졌다. 푸른 물빛 아래 물고기들이 유유히 헤엄쳤다.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넓은 공간을 우리 둘만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발소리가 유리벽에 부딪혀 이상하게 크게 울렸다. "조용하죠." 그녀가 옆에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수조를 구경했다. 그녀는 물고기 종류를 하나씩 설명해줬다. 이건 노랑쥐치, 저건 청줄돔. 생물 교사답게 지식이 상세했다. 말투도 학교에서 쓰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는 미묘하게 달랐다. 나는 그 설명을 들으며 점점 긴장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조금씩 빠졌다. "이거 봐요. 저 물고기, 몸을 뒤집으면서 헤엄쳐요. 특이하죠." 그녀가 손끝으로 유리를 가리켰다. 손끝이 유리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는 그 손을 보다가, 얼른 시선을 돌려 물고기를 바라봤다. 대형 수조 앞에 이르자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거대한 가오리가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날개 같은 몸이 물살을 가르며 흔들렸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 문자, 재밌었다고 한 거." 그녀가 갑자기 그 얘기를 꺼냈다.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진짜였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다. 나는 그녀를 돌아봤다. 푸른 조명이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눈매가 평소보다 더 짙어 보였다. "근데 조심해야 해요." "뭘요." "우리 사이,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말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방금까지 풀렸던 긴장이 다시 조여왔다. 그녀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나는 선생이고, 이도현 학생은 학생이니까." "그럼, 왜 여기 데려왔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가오리가 우리 앞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 위로 잠깐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서글퍼 보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 대답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확신도 부정도 아닌 그 애매한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그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풀이했다. 잘 모르겠다는 게, 나를 데려온 이유를 모른다는 건지, 아니면 이 관계 자체를 모른다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다시 걸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도 물을 수 없었다. 대신 눈앞에 펼쳐지는 수조들을 하나씩 지나쳤다. 해파리가 조명 아래 천천히 부풀었다 줄어드는 걸 보면서도, 내 머릿속은 방금 그녀가 남긴 말로 가득 차 있었다. 관람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통로를 지나며 그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이도현 학생." "네." "수능 끝나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안 된다는 걸까, 아니면 그때는 된다는 걸까. 수능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낯설게 들렸다. 지금 이 순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른 세계의 말 같았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그녀를 따라 걸었다. 출구로 향하는 통로에는 작은 조명들이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발밑으로 흐릿한 빛이 지나갈 때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조금 더 오래 바라봤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아니라 벨소리였다.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조용한 주차장에 크게 울렸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하고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잠깐만요." 그녀는 전화를 받으러 몇 걸음 떨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발밑에서 자동차 몇 대가 지나가는 소리, 멀리서 파도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목소리가 낮아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한 마디는 분명히 들렸다. "강 선생님, 지금 그 얘기 할 때 아니에요." 그 이름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강태호. 학교에서 그녀와 자주 마주치는 선생님이었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무언가 불편한 기색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었고, 걸음을 옮기는 속도도 조금 빨라져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대답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할 때, 사람들은 대개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차에 다시 올라타고 학교 앞까지 돌아오는 길, 그녀는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라디오도 꺼져 있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규칙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나는 창밖을 보며 그 통화 내용을 계속 곱씹었다. 강태호가 왜 이 시간에 전화를 했을까. 무슨 얘기를 하려던 걸까. 혹시, 우리 사이를 눈치챈 걸까.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속이 서늘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단순히 곤란해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자리, 나의 학교생활,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이 걸려 있을 수도 있었다. 차가 정문 앞에 멈췄다. 헤드라이트가 텅 빈 교문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내리기 전, 그녀를 돌아봤다. "다음엔 언제 봐요."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강 선생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차창을 올렸다. 유리에 내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가, 곧 그녀의 얼굴로 바뀌었고, 그마저도 차가 출발하며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차를 바라봤다. 미등의 붉은 빛이 골목을 돌아 사라질 때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강태호가 무엇을 알고 있는 건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관계는 이미 우리 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어버렸다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몇 번이나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그녀에게 뭐라고 문자를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강 선생님 얘기가 뭔지 물어봐도 될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지.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한 채 집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눕고도 한참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보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순서대로 되짚어봤다. 문자, 차, 향수 냄새, 수족관, 가오리, 그리고 그 통화. 강 선생님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강태호가 정확히 뭘 알고 있는지, 그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지, 나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이 조용하고 은밀했던 관계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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