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쌤, 지금 유혹하시는 거죠?

4화

수요일 방과후, 나는 생물실 앞에서 명단을 다시 확인했다. 게시판에 붙은 A4용지 한 장. 프린터 잉크가 옅어서 글씨가 조금씩 번져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종이를 짚으며 이름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분명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다른 이름은 없었다. 원래 명단에 있던 학생들은 오히려 빠져 있었다. 혼자였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다섯 명이었던 명단이 오늘은 딱 한 줄, 내 이름만 남아 있었다. 종이 아래쪽에는 담당 교사 한서은이라는 서명이 단정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형광등 불빛이 얼굴에 먼저 닿았다. 한서은은 이미 교탁 앞에서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흰 블라우스에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회색 스커트. 늘 그렇듯 흐트러짐 없는 차림이었다. 책상 위에는 프린트 뭉치와 마커, 그리고 얇은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왔어요." 그녀가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가 텅 빈 교실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형광등 불빛 아래 그녀의 얼굴이 유독 또렷하게 보였다. 옆으로 넘긴 머리카락 한 올이 뺨을 스치며 흔들렸다. "다른 애들은요." "오늘은 이도현 학생만 진도가 늦어서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진도가 늦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시험에서 나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애들도 셋이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프린트를 나눠줬다. 손끝이 스쳤다. 짧은 접촉이었지만 심장이 크게 뛰었다. 종이의 서늘한 감촉보다 그 손끝의 온도가 더 오래 남았다. 수업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진행됐다. 그녀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세포 분열 과정을 짚어가며 판서를 하고, 중간중간 질문을 던졌다. 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자꾸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날 밤의 그 문자, 그리고 그 짧은 답장. 재밌네요. 그 세 글자가 왜 그렇게 오래 머릿속에 남는지 알 수 없었다. 별거 아닌 말이었는데도, 잠들기 전까지 몇 번이나 화면을 켜서 다시 읽었었다. "딴생각하죠."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마커를 든 손이 허공에 멈춰 있었고,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아, 아니요." "거짓말." 그녀가 살짝 웃었다. 그 웃음에 숨이 막혔다. 웃음이라기엔 짧고, 조롱이라기엔 부드러운, 그 중간 어디쯤인가에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애써 시선을 프린트로 떨어뜨렸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그녀는 서류 봉투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두꺼운 갈색 봉투였다. 겉면에는 아무 글씨도 없었다. "교무실에 이거, 강태호 선생님한테 전해줄 수 있어요?" "네." 나는 봉투를 받아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는 이미 어둑했다. 창밖으로 노을이 번지고 있었고, 운동장에서는 몇몇 아이들이 축구를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복도를 지나며 계속 그 문자를 생각했다. 재밌네요, 라는 그 짧은 말이 자꾸 머릿속을 헤집었다. 무슨 뜻이었을까. 놀리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생각이 거기까지 갔을 때 나는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상상을 하지 말자고,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교무실 문을 열었다. 안은 조용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이미 퇴근한 뒤였다. 책상마다 컴퓨터 화면이 꺼져 있었고, 형광등 몇 개만 남아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한쪽 책상에서 강태호 선생님이 서류를 보고 있었다. 넥타이를 반쯤 풀어놓은 채,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있었다. "저, 한서은 선생님이 이거 전해달라고 하셔서요." 그가 고개를 들고 봉투를 받았다. 손끝으로 봉투 겉면을 한 번 훑더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봉투가 아니라 내 뒤쪽을 향했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한서은이 교무실 입구에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발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녀는 걸어오다가 문틀에 스커트 자락이 걸린 듯 잠시 몸을 숙였다. 그 순간 블라우스 앞섶이 살짝 벌어졌다. 짧은 순간이었다. 강태호의 시선이 그쪽으로 고정됐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 역시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곧 옷매를 정리하며 아무렇지 않게 걸어왔다. 걸음걸이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마치 방금의 그 장면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강 선생님, 그 서류 확인해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강태호는 헛기침을 하며 서류를 펼쳤다. 안경을 다시 코 위로 올려 쓰며, 시선을 서류에 붙박았다. "아, 네. 확인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어색함이 섞여 있었다. 손가락이 종이를 넘기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나가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발이 바닥에 붙은 것 같았다. "이도현 학생, 이제 가도 돼요." 한서은이 나를 향해 말했다. 그 말투는 방금 전과 다를 것 없이 평온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교무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참았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는 걸 알았다. 강태호를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의 눈빛만은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떠올렸다. 문틀에 걸린 스커트 자락, 살짝 벌어진 블라우스, 그리고 강태호의 얼어붙은 시선.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그 생각을 끝맺지 못한 채 나는 신발장 앞에 도착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강태호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는 나를 잠깐씩 쳐다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시선에는 분명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가 복도에서 나를 붙잡았다. "이도현." "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출석부를 옆구리에 끼며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요즘 한 선생님 수업 자주 남아 있던데." 그의 말투에는 뭔가 캐묻는 느낌이 섞여 있었다. 가볍게 던지는 말 같았지만, 나는 그 안에 숨은 날을 느꼈다. 나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보충수업이라서요." "그래." 그는 더 묻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뭔가를 의심하는 듯했다. 그러다 짧게 웃으며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 손길이 별거 아닌 것처럼 가벼웠지만,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교실에 들어가서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강태호가 무엇을 알고 묻는 건지, 아니면 그저 넘겨짚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수업 시간 내내 칠판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오후, 휴대폰이 울렸다. 책상 위에 엎어놓은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을 켜자 낯익은 이름이 떠 있었다. 한서은이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짧은 문장이었다. 나는 손이 떨리는 걸 느끼며 답장을 썼다.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썼다. 너무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과, 너무 뜸을 들이면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네, 있어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야 숨을 뱉었다. 화면 위에 뜬 숫자 1이 사라지는 데는 채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럼 이따 학교 앞으로 나와요. 갈 데가 있어요." 그게 끝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갈 데가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디로 가자는 건지 아무 설명도 없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거절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에 남은 화면의 온기가 이상하게도 오래 가시지 않았다. 교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질지, 그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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