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딸을 위해, 꿇기로 했다

4화

찻집 안은 조용했다. 주인장은 내가 미리 챙겨준 돈을 받고 자리를 비켜줬다. 돈의 힘이란 이렇게 강력하다. 덕분에 넓지도 않은 공간에 우리 둘뿐이었다.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찻잔에서 올라오는 김이 그 햇살을 가로지르며 흩어졌다. 선하란이 맞은편에 앉았다. 860년을 살아온 위엄이 그 자세 하나에 다 담겨 있었다. 등은 곧고, 시선은 흔들림 없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인간이라면 진작 눈을 피했을 거다. '저게 바로 짬빠라는 건가.'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살다 살다 860년 산 사람 앞에 앉아볼 일이 있을 줄이야. 학창시절 도덕 교과서에도 이런 상황은 안 나왔던 것 같은데. "용건을 말하세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고 서늘했다. 860년 산 사람의 목소리라 그런지, 발음 하나하나에 무게가 있었다. 마치 오래된 종이 울리는 소리 같았다. '멋있네, 정말.' 나는 일부러 여유를 부리며 찻잔을 들었다. 손끝이 살짝 떨리는 걸 숨기려고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다. 겁먹은 거 티 나면 협상에서 지는 거니까. "저는 그냥 자료를 발견했을 뿐입니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걸 그냥 넘기기엔 아깝잖아요." "돈을 원하는 겁니까?" 그녀가 물었다. "금액을 말하세요. 협상하겠습니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860년 살면서 이런 협박, 이런 협상 몇 번은 해봤겠지. 어쩌면 나보다 이런 상황에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하긴, 저 나이면 태조 시대 정치 스캔들도 몸소 겪어봤을 거 아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웃음이 나올 뻔했다. 겨우 참았다. "돈이면 재미없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선하란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미세한 흔들림을 놓치지 않고 봤다. 860년의 관록으로도 못 가리는 게 있구나. "그럼... 뭘 원합니까." 그녀가 낮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자료 캡처 화면을 그녀 앞에 펼쳤다. [문서: 채용 뇌물 자금 흐름 - 3건] [음성 파일: 이사회 접촉 녹취] 선하란의 얼굴이 순간 무너졌다. 860년 위엄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균열이었다. '저거지, 저 표정.' 이런 표정 보려고 사람들이 도박도 하고 낚시도 하는 거 아니겠나. 승리의 맛이란 원래 이런 건가. "이 자료가 청람성 상원 감사위원회로 넘어가면, 따님이 어떻게 될지는 잘 아시죠?" 나는 부드럽게 물었다. 선하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찻잔을 쥔 그녀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협상할 여지는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돈도, 명예도, 정치적 대가도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그녀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었다. 여기서 뜸을 들이는 게 포인트다. 너무 빨리 말하면 없어 보이니까. 찻잔을 한 번 더 들어 홀짝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의원님이요." 나는 짧게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요?" 처음으로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지, 이 정도 반응은 나와줘야지.' 860년 산 사람도 결국 사람이었다. 예상치 못한 요구엔 목소리가 떨리는구나. "제 숙소로 오세요. 오늘 밤부터, 제가 원할 때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대가로 이 자료는 영원히 봉인합니다." 선하란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860년 산 사람의 침묵이란, 인간의 몇 년치 고민을 압축한 무게가 있었다. 찻집 안의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째깍, 째깍. 그 소리마저 그녀의 고민에 박자를 맞추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요구입니다." 그녀가 겨우 뱉었다. "저는 청람성 상원 의원입니다. 이런 요구는—" "그럼 따님 자격 박탈되는 걸 지켜보시겠어요?" 나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선하란의 입이 다시 닫혔다. '그럼 그렇지.' 결국 다 자식 문제로 돌아온다. 860년의 위엄도, 청람성 상원의 지위도 자식 앞에서는 다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부모 마음이란 시대를 초월하는 모양이었다. 협상은 몇 번 더 오갔다. 선하란은 온갖 방법으로 조건을 바꾸려 했다. 나름 860년 살면서 쌓아온 협상 스킬을 다 꺼내드는 느낌이었다. "기간을 정합시다." 그녀가 말했다. "석 달로 하죠. 딱 석 달이면 충분할 겁니다." "안 됩니다." 나는 잘랐다. "그럼 여섯 달." 그녀가 다시 제안했다. 목소리에 미묘한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안 됩니다." 나는 단호하게 다시 잘랐다. "횟수를 제한합시다." 그녀가 다시 시도했다. "한 달에 두 번,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나는 또 잘랐다. 세 번째 거절에서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 사람 진짜 안 물러서는구나' 싶은 표정이었다. 당연하지. 이건 협상이 아니라 통보다. 내가 굳이 협상하는 척 시간 끌어준 것도 예의차 하는 거지, 진짜로 조건 바꿔줄 생각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지쳤는지 눈을 감았다. 긴 눈썹이 살짝 떨렸다. "...한 가지만 허락해주세요." 그녀가 낮게 말했다. "제 경호팀장을 동행시키겠습니다. 그저 신체적 안전을 확인할 목적으로." 나는 잠시 고민했다. 손해 볼 건 없었다. 오히려 재밌을 것 같았다. '경호팀장이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나름 스릴 있겠는데.'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남 시선 신경 쓰는 취향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조건을 하나 걸어놓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목라윤 씨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선하란의 눈이 커졌다. 내가 경호팀장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은 모양이었다. '이 정도 정보력은 기본이지.' 860년 산 상원 의원 정보 캐는데 경호팀장 이름 하나 못 알아내면 그게 프로겠나.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었다. "동행은 허락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 목라윤 씨는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조건입니다." 선하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켜보게 만드는 것. 그것 자체가 새로운 굴욕이라는 걸, 그녀도 뒤늦게 깨달은 표정이었다. 경호팀장이 그저 옆에서 지켜만 봐야 한다는 사실이, 어쩌면 이 협상 전체보다 더 견디기 힘든 조건일지도 몰랐다. 860년 위엄으로도 자존심이란 건 쉽게 버려지지 않는 법이니까. "오늘 밤 열 시. 숙소 위치는 문자로 보내겠습니다." 나는 짧게 통보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었다. 이미 협상은 끝났고, 남은 건 실행뿐이었다. 찻집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봤다. 선하란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860년 산 사람의 어깨가, 처음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걸 봤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서늘했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세 시. 열 시까지는 아직 일곱 시간이 남았다. '그 사이에 뭘 해야 할까.' 목라윤이라는 이름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경호팀장이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 끝날까. 860년 산 여자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보통내기는 아닐 텐데. 문득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오늘 밤,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 예감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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