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 딸을 위해, 꿇기로 했다

2화

협회에 있는 동료들은 나를 '일 잘하는 놈'이라고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일 처리 하나는 깔끔하다는 소리를 팔 년 내내 들었으니까. 다만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면 다들 기겁하겠지. '협회 베테랑 요원이 남의 나라 상원 의원한테 협박 문자 넣는 중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 선하란의 답신은 다음 날에도 오지 않았다. 첫날은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상대는 860년을 산 여자다. 인간 나이로 치면 백 살 넘은 노인이 스마트폰 문자 하나에 바로바로 답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틀째 되던 날, 청람성 외교 채널 서버에서 조회 기록이 잡히기 시작했다. 내 프로필, 흑성단 경력, 소속 부서, 심지어 예전에 처리했던 사건 이력까지. 하나둘씩 클릭해서 열람한 흔적이 로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쯤 되면 거의 뒷조사 수준이다. '나에 대해 뭔가 알아내려는 건가.' 나는 그 로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860년을 산 사람의 판단력이라는 게 이 정도인가 싶었다. 협박 문자 받으면 상대 신원부터 캐는 건 인간 세계 드라마에서도 흔한 클리셰인데. 수백 년을 살았으면 좀 더 창의적인 대응이 나올 법도 한데, 결국 하는 짓은 인간이나 청람족이나 비슷하구나 싶어서 살짝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뭘 캐도 소용없다. 흑성단 요원 신상은 국가 최고등급 기밀이다. 대통령이 와도 못 뚫는 벽이고, 고려연합 정부 정보망을 다 동원해도 이름 세 글자 이상은 못 얻어간다. 선하란이 아무리 청람성 상원 의원이래도, 심지어 외교관 자격으로 압박을 넣어도 뚫을 수 있는 벽이 아니다. '헛수고할 시간에 차라리 딸이랑 얘기라도 하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회 로그가 하나씩 늘어나는 걸 구경했다. 마치 게임에서 상대가 무의미한 스킬을 반복해서 쓰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약점 탐색 - 실패. 약점 탐색 - 실패. 약점 탐색 - 실패.' 효과는 없었지만 재미는 있었다. 삼일 째 되던 날, 마침내 답신이 왔다.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지 모르겠으나, 만남에는 응하지 않겠습니다." 딱 한 줄. 격식이라곤 없이 냉정하게 잘라내는 문장이었다. 문장부호 하나 흐트러짐 없이, 마치 미리 준비해둔 각본을 읽는 것처럼 완벽하게 정제된 거절. 860년 살아온 사람의 위엄이란 이런 건가. 나는 잠깐 감탄했다. 이 정도면 협박 문자 받는 쪽 매뉴얼 1위 항목이라 해도 믿을 만했다. 동시에 조금 짜증도 났다. '이렇게 나오면 재미없잖아.'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봤다. 협회 사무실 형광등이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생각을 정리했다. 선하란은 지금 상황을 이렇게 읽고 있을 거다. 하나, 자료가 진짜인지 아직 확신 못 했을 수도 있다. 둘, 협박자가 진짜 배포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할 수도 있다. 셋, 배포되더라도 딸의 파장을 최소화할 방법을 찾고 있을 수도 있다. 넷, 어쩌면 이게 자기 정치적 라이벌이 파놓은 함정이라고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 다 틀렸다. 자료는 진짜고, 나는 능력이 있고, 파장을 최소화할 방법은 없고, 정치적 라이벌 따위는 이 일에 관심도 없다. 이건 순전히 나 혼자, 개인적인 이유로 벌이는 일이다. '이걸 알면 더 소름 돋을 텐데.' 나는 청람성 법률을 좀 찾아봤다. 협회 데이터베이스를 뒤지느라 결재 서류 처리는 뒷전으로 밀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쪽이 더 중요한 일이니까. 뇌물수수로 채용된 사실이 공적으로 드러나면 해당 인물은 즉시 자격 박탈, 소급 처벌 대상이 된다. 조문 하나하나가 살벌했다. 인간 사회 공무원 시험 부정행위 적발되면 자격 취소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사람의 사회적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수준이었다. 선하늬는 지금 천경 상고문명 대박물관에서 학예사로 일하고 있다. 채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전공 살려서 취업한 케이스다. 인간 세계로 치면 명문대 나와서 국립박물관 학예연구사로 들어간 셈이니, 나름 성실하게 자기 앞길 개척한 축에 속한다. 그런데 그 시작이 뇌물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쫓겨나는 건 그냥 시작일 거다. 청람족 사회는 명예를 잃은 가문에 대해 상상 이상으로 냉정하다. 평생 사교 모임에도 못 나가고, 결혼도 못 하고, 심지어 시민권 재심사까지 걸릴 수 있다. 인간 사회로 치면 신상 털려서 인터넷에 실명 박제되고, 그 여파로 취업도 못 하고 연애도 못 하고 이사 갈 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그것도 평생. 그러니까 딸에게는 이게 끝장인 셈이다. '이걸 알면서도 무시할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 없다. 860년 동안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여자라 해도, 자식 문제 앞에서는 별수 없을 거다. 부모라는 존재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거니까. 인간이든 청람족이든, 수명이 80년이든 860년이든 그 부분만큼은 똑같더라. 나는 최후통첩을 준비했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잠깐 고민했다. 너무 세게 나가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너무 약하게 나가면 또 무시당할 수도 있다. '적당히, 딱 숨통 조이는 만큼만.' [메시지 발송] "48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만나지 않으시면 이 자료 전체가 청람성 상원 감사위원회로 넘어갑니다. 그 후에는 저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전송. 문장을 다시 읽어봤다. 담담하고, 절제되어 있고, 무엇보다 협상의 여지를 살짝 남겨둔 문장. 이 정도면 협박 문자 대회 나가도 입상권이다. 이번 답신은 바로 왔다. 거의 3초도 안 걸린 것 같았다. 화면 상단에 뜬 알림을 보고 나는 살짝 웃었다. "당신, 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화면에 뜬 문장은 짧았지만 손이 떨렸는지 오타가 하나 섞여 있었다. '원하는' 자리에 한 글자가 잘못 들어가 있었다. 860년을 산 사람도 급하면 오타가 나는구나. 의외로 인간적인 구석이 있다. 나는 잠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원하는 게 뭐냐고?' 솔직히 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바로 던지면 재미가 없다.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뭐라고 답해야 이 상황이 재밌게 흘러갈지 고민했다. 너무 구체적으로 쓰면 협상의 주도권을 내가 먼저 넘겨주는 꼴이 된다. 너무 모호하게 쓰면 상대가 시간을 끌 핑계를 준다. '그러니까 최대한 짧고, 최대한 무게감 있게.' 결국 짧게 썼다. "만나서 얘기하죠. 시간은 제가 정합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나는 그녀의 프로필을 한 번 더 봤다. 증명사진 속 얼굴은 무표정했다. 수백 년 동안 카메라 앞에서 감정을 숨기는 훈련이라도 한 것처럼, 표정 하나 흔들림이 없었다. 860년을 살아온 청람성 상원 의원, 선하란. 외교관, 학자, 어머니. 그 모든 이름 앞에 이제 하나가 더 붙을 거다. 한도현의 것.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녀가 무엇을 내놓을지,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명예도, 자존심도, 심지어 정치적 입지도. 자식 문제 앞에서는 다 협상 카드가 된다. 860년을 살아온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48시간짜리 시계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그 옆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미 다 식어서 맛도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그 시간 안에 무슨 수를 쓸지 궁금했다. '과연 순순히 만나러 나올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다른 수를 찾을까.' 어느 쪽이든,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이 얼마나 재밌을지는, 이제부터 지켜볼 일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47시간 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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