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컷!"
조감독의 외침이 세트장을 갈랐다.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스태프들의 숨죽인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모니터를 노려봤다.
화면 속 이서연은 대본을 든 손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 대사 진짜 이상해요. 이렇게는 못 해요."
스물두 살.
걸그룹 출신 신인.
촬영 삼 일째, 벌써 다섯 번째 NG였다.
모니터 옆에 서 있던 촬영감독이 슬쩍 나를 돌아봤다.
말은 안 했지만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또 시작이네요, 감독님.
"이서연 씨."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감독으로서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대본 그대로 가겠다고 했잖아요."
"그건 제가 언제요···?"
이서연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존댓말인데도 말투 끝이 뻣뻣했다.
뒤에서 오혜진이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본 리딩 때 분명히 사인했을 텐데요."
정민수가 옆에서 클립보드를 들어 보이며 끼어들었다.
이서연은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랑 지금이랑 느낌이 다르잖아요. 대본이 문제예요."
"둘 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접읍시다."
오혜진이 툭 던졌다.
주연 배우, 결혼과 출산 이후 복귀작.
현장에서 제일 목소리가 큰 사람이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턱 근육이 저절로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손끝이 대본 표지를 두드렸다.
투둑. 투둑.
스태프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는 게 보였다.
누군가는 조명 스탠드를 괜히 만졌고, 누군가는 케이블을 정리하는 척했다.
아무도 이 침묵을 먼저 깨고 싶어 하지 않았다.
스태프 오십 명, 카메라 세 대, 하루 대여료가 얼마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어이없는지 알 것이다.
CF 하나 찍자고 이 돈을 쓰는 게 아니다.
이건 내 이름으로 나가는 작품이다.
조감독이 시계를 보며 눈치를 줬다.
해가 지기 전에 야외 씬을 하나라도 더 따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무시했다.
"오늘 촬영 여기까지 하죠."
결국 내가 먼저 말했다.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스태프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흩어졌다.
의자에서 일어나며 이서연을 봤다.
그녀는 이미 매니저와 함께 딴 데를 보고 있었다.
매니저가 뭐라 속삭이자 이서연은 픽 웃었다.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는 얼굴이었다.
그 순간,
뭔가 뒤틀리는 감각이 명치를 밀고 올라왔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대본을 접어 옆구리에 끼우고 아무 말 없이 세트장을 빠져나왔다.
촬영장 밖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우는데 정민수가 다가왔다.
"감독님, 오늘 스케줄 다 빠졌습니다."
프로덕션 매니저 정민수는 항상 결과만 보고했다.
원인은 알려줘도 해결은 내 몫이었다.
"이서연이 문제야, 오혜진이 문제야."
"둘 다 감독님 지시는 안 듣는다고···"
말끝이 흐려졌다.
나는 담배를 발끝으로 비벼 끄며 하늘을 봤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편집실에서 연락 왔었어요. 이번 주까지 초안 넘겨야 한다고."
"알아."
"근데 이 상태로 며칠 더 갈 것 같은데···"
정민수가 클립보드를 가슴에 껴안으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차라리 대본 좀 순하게 바꾸는 게 어떨까요. 두 분 다 워낙···"
"안 돼."
내가 대본을 바꾸는 순간, 저 둘은 그게 자기들이 이겼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씬에서 또 다른 걸로 트집을 잡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양보하다 보면 결국 이 작품은 내 것이 아니게 된다.
예전에 형진 형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훈아, 배우는 다루는 게 아니야. 훈련시키는 거야.'
노형진.
내가 조연출로 붙어 다니던 시절의 감독.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가 현장을 어떻게 통제했는지는 아직 기억한다.
말 안 듣는 여배우는 며칠씩 대기시켰다.
스케줄을 쥐고 흔들면 누구든 무릎을 꿇었다.
밴에 앉아서 대본도 안 보고 하루 종일 기다리게 만드는 거야, 형진 형은 그렇게 말했었다.
사흘 지나면 다들 알아서 기어들어와.
그런데 지금 이서연은 그 방식조차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성그룹이 뒤에 있다는 소문 때문인지, 태도가 지나치게 당당했다.
스케줄을 흔들어도 어차피 다른 일이 없어서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오혜진 역시 이미 정상에 서 봤던 사람 특유의 여유가 있었다.
잃을 게 없다는 얼굴들.
그게 제일 다루기 힘든 부류였다.
"정민수."
"네."
"이서연이랑 오혜진, 이번 주말에 시간 되는지 알아봐."
정민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대본 다시 맞춰야 하니까."
짧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촬영장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
소리쳐도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
정민수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가 어두워진 하늘로 흩어졌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이서연이 대본을 내리며 나를 정면으로 쳐다봤던 그 눈빛을 계속 떠올렸다.
무시.
그게 정확한 단어였다.
어릴 때부터 남한테 무시당하는 걸 견디지 못했다.
특히 나보다 가진 것도 없는 애가 나를 그렇게 볼 때는.
초등학교 때였나, 전학 온 첫날 누군가 내 신발을 보고 웃었던 기억이 문득 스쳤다.
그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명치가 뜨거워지고 손끝이 차가워지는, 이상한 온도차.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가 차가웠다.
손끝으로 핸드폰을 켜서 이서연의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웃고 있는 사진들.
브랜드 협찬 태그가 줄줄이 달려 있었다.
누가 봐도 잘나가는 신인의 계정이었다.
나는 그 사진들을 하나씩 넘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스칠 때마다 사진 속 얼굴이 조금씩 달라졌다.
웃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 카메라를 정면으로 쏘아보는 얼굴.
전부 다 자신만만했다.
그러다 문득, 오혜진의 계정도 열었다.
최근 게시물엔 아이 사진이 걸려 있었다.
웃는 얼굴, 평범한 가정의 냄새.
댓글 창엔 축하한다는 말들이 가득했다.
복귀 축하합니다, 여전히 예쁘시네요, 아이가 엄마 닮았어요.
두 계정을 나란히 켜놓고 번갈아 보다가, 나는 핸드폰 화면 밝기를 낮췄다.
이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놓으면 재밌는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다.
와이퍼가 느리게 앞유리를 훑고 지나갔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습관처럼 켜져 있었다.
나는 그걸 끄지 않고 그냥 뒀다.
정민수한테서 문자가 왔다.
[두 분 다 이번 주말 스케줄 비었습니다. 시간 잡을까요?]
나는 답장을 눌렀다.
[별장으로 잡아. 대본 논의라고 해.]
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이상하게 차분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을 그냥 확인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신호가 바뀌고 차가 움직였다.
창밖으로 남양주 방향 도로 표지판이 지나갔다.
촬영소 근처, 골목 안쪽에 있는 낡은 약국 하나가 떠올랐다.
형진 형이 예전에 알려준 곳이었다.
'여기 주인 입 무거워. 뭐든 구해줘.'
그때는 그냥 흘려들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자꾸 되풀이됐다.
뭐든 구해줘, 라는 말의 무게가 그날과 지금이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핸들을 꺾어 방향을 바꿨다.
백미러로 보이는 내 눈이 낯설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절대 이런 길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서연이 대본을 내리며 나를 쳐다봤던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내비게이션이 새 경로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목적지까지 십오 분.
차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창문을 살짝 내렸다.
차가운 밤바람이 훅 들어왔다.
액셀을 밟는 발끝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