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공 불구, 태양을 삼키다

4화

"뒷산에요." 나는 대답했다. 최대한 평소처럼. 백선화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짧은 대답이었지만, 뭔가 더 묻고 싶은 눈치였다. 그녀는 손에 든 소쿠리를 옆구리에 걸치고 서서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옷자락에 흙이 묻었나, 신발에 나무껍질이 붙었나, 그런 걸 살피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가 뒷산에서 나무가 흔들렸거나 흙이 파인 흔적을 봤을까 봐 마음이 조여들었다. "요즘 자주 가더구나." 백선화가 말했다. 부엌 쪽에서 국 끓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거기 뭐 재밌는 게 있느냐." "그냥, 바람이 좋아서요." 나는 대답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게 신경 썼다. 그녀는 픽 웃었다. "도련님이 언제부터 바람을 좋아하셨는지." 그러고는 더 묻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다행이었다. 완전히 넘어간 건지, 아니면 그냥 넘겨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안도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며칠 동안 나는 훨씬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뒷산 대신 마당 구석, 사람이 잘 안 보는 시간대를 골라 볕을 쐈다. 아침 일찍, 하인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시간. 혹은 점심 무렵, 다들 밥을 먹으러 들어간 사이. 그 짧은 틈을 노려서 마당 구석 담벼락에 등을 붙이고 서 있었다. 누가 보면 그냥 볕을 쬐는 것처럼 보이게, 하품도 몇 번 하고 눈도 게슴츠레하게 뜨고. 축적량은 하루에 많아야 3에서 5퍼센트씩 올랐다. 흐린 날은 거의 오르지 않았다. 구름이 낀 하늘을 보면서 속으로 욕을 삼켰다. 나쁜 날씨한테 화내봐야 뭐 하나. 그래도 화가 났다. 밤이 되면 오히려 조금씩 깎여나가는 걸 확인했다. [축적량 34% → 야간 소모 시작] 낮에 모은 걸 밤에 까먹는 구조였다. 태양이 뜨지 않으면 이 힘은 유지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건 약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명확한 규칙이었다. 규칙이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통제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니까. 문제는 그 규칙을 지키려면 하루 종일 해를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거였다. 밥을 먹다가도 창문 밖 하늘을 확인했다. 잠들기 전에도 창틀 너머 별빛을 보면서 오늘 볕을 얼마나 쬐었는지 계산했다. 이러다 해바라기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웃을 일은 아니었지만 웃겼다. 나는 그 사이 문파 아이들의 훈련장 근처를 몇 번 지나쳤다. 우연은 아니었다. 강윤의 기억 속 훈련장 뒤편에는 담이 낮은 구간이 있었고, 거기서 아이들의 초식 연습을 몰래 볼 수 있었다. 담 너머로 고개만 살짝 내밀면 훈련장 전체가 다 보였다. 흙바닥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고, 나무로 깎은 목검을 든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청운문의 기초 초식은 "청류검법"이라 불렸다. 발놀림과 검의 궤적이 물처럼 흐르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고 했다. 사범으로 보이는 어른이 앞에 서서 구령을 붙이면, 아이들이 일제히 발을 옮기고 목검을 그었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 다만 발이 흙을 스치는 소리,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만 규칙적으로 반복됐다. 스윽. 스으윽. 나는 몇 번의 훈련을 보고, 그 동작을 머릿속으로 따라 그려봤다. 발이 어디로 가는지, 무게가 어느 발에서 어느 발로 넘어가는지, 검을 쥔 손목이 어떻게 꺾이는지. 몇 번 보니 순서가 눈에 익었다. 아이들 중 유독 동작이 굳은 녀석 하나가 있었는데, 사범한테 몇 번이나 손등을 맞으면서도 계속 같은 자리에서 발이 엉켰다. 남 일 같지 않았다. 나도 지금 몸은 강윤의 것이지만, 이 몸이 원래 저런 걸 잘하는 몸인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다 사람이 없는 시간, 나는 마당에서 나뭇가지를 검처럼 쥐고 그 동작을 흉내 냈다. 놀라운 건, 몸이 그 동작을 처음 해보는데도 어색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균형이 자연스럽게 잡혔다. 발놀림도 정확했다.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순간, 다음 발이 저절로 그 자리를 찾아갔다. 마치 몸이 이미 그 순서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에너지 축적량과 신체 반응 속도 비례 확인] 또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힘만 세지는 게 아니라, 몸의 반응 속도나 균형 감각까지 좋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훈련장에서 몇 년씩 배운 아이들보다, 이 며칠 만에 흉내 낸 내가 더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재능이 아니었다. 규칙이었다. 태양 아래 서 있는 시간이 곧 실력이 되는 규칙. 나는 나뭇가지를 몇 번 더 휘둘렀다. 삼보전신, 이라는 이름은 아직 몰랐지만 세 걸음에 걸쳐 몸을 돌리는 동작이었다. 첫 걸음에 축을 잡고, 둘째 걸음에 무게를 넘기고, 셋째 걸음에서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나는 그 세 걸음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처음엔 어설펐지만 다섯 번째쯤엔 발끝이 흙바닥에 그리는 궤적이 거의 똑같아졌다. 이 정도면, 하고 생각하며 나뭇가지를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어디서 배웠느냐." 조현탁이었다. 강태산의 동료 무사, 담 너머 훈련장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걸음이 느긋했다. 나는 나뭇가지를 얼른 등 뒤로 숨겼다. "그, 그냥 흉내만…" 나는 말을 더듬었다. 조현탁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내 발밑, 흙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내려다봤다. "청류검법의 삼보전신(三步轉身)이었다. 초식 이름도 모르는 아이가 그 발놀림을 그렇게 정확히 밟다니." 심장이 덜컥했다. 들켰다. "그, 여러 번 보다 보니까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여러 번 보다 보면 이렇게 되나." 조현탁이 되물었다. 목소리에 웃음기는 없었다. "내가 아는 놈들 중엔 십 년을 봐도 저 발자국처럼 못 찍는 놈이 있다." "운이 좋았나 봐요." 내가 말했다. 조현탁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보고 따라 하는 것도 재능이다. 몸이 기억하는 거니까." 그는 그렇게만 말하고 지나갔다. 다행이다. 완전히 넘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눈빛은, 완전히 믿는 눈빛은 아니었다. 몇 걸음 걸어가던 조현탁이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더 쳐다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훈련장 쪽으로 사라졌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뭇가지를 슬그머니 담벼락 아래로 던져 넣었다. 저건 이제 증거였다. 태워버려야 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뭇가지 하나에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내가 좀 우스웠지만, 지금은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그날 밤, 나는 이불 속에서 다시 상태를 확인했다. [축적량 39%] [경고: 외부 관찰 위험 수준 상승] 경고문이 처음으로 떴다. 이 힘이 커지면 커질수록, 숨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뜻이었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채로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위험 수준 상승. 얼마나 위험한 건지, 구체적인 숫자로 알려주면 좋을 텐데, 이 시스템은 그런 세심함이 없었다. 문제는 숨기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 힘이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질지, 그리고 그 순간이 언제 올지, 나로서도 전혀 알 수 없다는 거였다.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 같았다. 다만 폭탄이 터지는 대신, 소문이 퍼지고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어느 쪽이 더 무서운지는 아직 몰랐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조현탁의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완전히 믿는 눈빛은 아니었다고, 몇 번이나 되새겼다. 저 사람은 분명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할 거다. 그게 강태산일지, 아니면 청운문의 다른 어른일지는 몰랐다.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은 아닐 게 뻔했다. 다음 날 아침, 마당에 나가자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강태산이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 앞에 청운문의 도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서 있었다. 어제 조현탁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둘 다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고, 도복 소매에는 청운문 특유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서 있는 자세만 봐도 예사 무사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를 다시 데려오시오." 그중 하나가 말했다.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최근 이상한 소문이 들려서." 소문. 나는 그 단어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강태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다시 사내들을 향했다가, 잠깐 흔들렸다. 저 표정을 나는 알았다. 뭔가를 감추려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도 요즘 매일 짓고 있는 표정이니까. "무슨 소문 말이오." 강태산이 물었다. "직접 보고 판단하시는 게 나을 것 같소." 사내가 짧게 대답했다. 더 설명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무슨 소문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강태산의 표정을 보면, 좋은 이야기가 아닌 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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