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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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지도 명목의 상담이 매일 반복되면서, 겉보기엔 지극히 정상적인 사제관계로 굴러가고 있었다.
서류상으로는 지도, 실제로는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고, 그 경계가 애매해질수록 나는 오히려 더 침착해지는 법을 배웠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문을 열고, 같은 자리에 앉는 것뿐인데도 그 반복 안에 스며 있는 온도는 매번 조금씩 달랐다. 어제는 서연이 창밖을 보며 한숨을 쉬었고, 그 전날은 펜 끝으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나를 흘겨봤었다. 그런 사소한 차이들을 나는 유난히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은 뭐 잘못한 거 없어요." 나는 상담실 문을 열며 여유롭게 말했고, 서연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럼 앉아서 자습이라도 해"라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존댓말과 반말이 뒤섞인 그 어투가, 우리 사이의 미묘한 온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며 괜히 가방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고, 서연은 그 소리에 잠깐 시선을 들었다가 다시 서류로 돌아갔다. 그 짧은 시선 교환이, 무슨 대단한 대화보다도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방학 때 뭐 하세요." 나는 별생각 없이 물었고, 서연은 여전히 서류를 넘기며 "그런 거 물어보라고 상담실 열어둔 거 아니야"라고 잘랐다. 그러면서도 대답을 완전히 회피하지는 않는 게, 서연다웠다. 나는 그 미묘한 배려를 눈치채면서도 모른 척 창밖을 봤다. 늦가을 햇살이 창틀에 걸려 부서지고 있었고, 그 빛이 서연의 옆얼굴에 닿아 있는 걸 나는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렵 학생회실 앞에서 강이로를 처음 제대로 마주쳤다.
복도를 지나가던 중이었는데, 학생회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걸음을 멈췄다.
"선배." 부르는 목소리가 유난히 달랐는데, 학생회 임원답게 딱딱한 말투 속에 이상하게 끈적한 게 섞여 있었다.
돌아보니 강이로가 서류철을 옆구리에 낀 채 서 있었고, 교복 재킷의 단추 하나를 풀어놓은 그 차림이 규정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는 걸 나는 무의식적으로 알아챘다.
"뭐야."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걸 느꼈다. 눈매가 우묵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순수한 호기심인지 다른 무엇인지 판별이 되지 않아서, 나는 그 자리에서 괜히 발끝을 움직였다.
"선배 요즘 상담실 자주 가시더라구요." 강이로가 웃으며 던진 말에, 나는 순간 손끝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그런데, 이 정보를 어디서 들었을까? 학생회 임원이 그런 사소한 동선까지 알고 있다는 게, 단순한 우연으로 넘기기엔 지나치게 정확했다.
"생활지도라잖아."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넘겼지만, 강이로의 눈빛엔 이미 뭔가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서류철을 품에 안은 채 한 걸음 다가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반걸음 물러났다.
"저도 언젠가 선배 관리해드리고 싶은데." 그녀는 노골적으로 말하며 내 팔을 살짝 스치듯 잡았고, 나는 그 손길에서 순수한 호감이 아니라 계산이 섞인 접근을 느꼈다. 손가락 끝이 소매 위를 지나가는 그 짧은 감촉이 이상하게 오래 남아서, 나는 팔을 슬쩍 뒤로 빼며 헛기침을 했다.
한심했다, 이런 노골적인 유혹 앞에서도 몸이 먼저 반응하려는 나 자신이. 머리는 이게 위험한 신호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몸은 그 온도에 어이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관리는 이미 충분히 받고 있어." 나는 애써 웃으며 자리를 벗어났고, 강이로는 등 뒤에서 낮게 웃는 소리를 냈다. 그 웃음소리가 복도 끝까지 따라오는 것 같아서, 나는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그날 저녁, 나는 윤하람 선배를 카페에서 만났다.
윤서아의 언니이자, 언젠가부터 나와 서연 모두와 이상하게 얽혀 있는 사람이었다. 약속을 정할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는데, 윤하람이 굳이 학교 밖 조용한 카페를 지정한 것부터가 그랬다.
카페 안은 저녁 시간이라 손님이 드문드문했고, 창가 자리에 앉은 윤하람은 커피잔을 손끝으로 돌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요즘 얼굴이 반쯤 죽어가는 게, 연애 문제구나." 윤하람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웃었고, 나는 그 웃음 안에 담긴 통찰력이 언제나 조금 무서웠다.
"뭐 그런 걸 다 물으세요." 나는 자리에 앉으며 어색하게 대답했고, 윤하람은 대답 대신 메뉴판을 내 쪽으로 슬쩍 밀어주며 재촉했다.
"서연 선생님 얘기예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고, 윤하람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피했다. 그 회피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어서, 나는 괜히 목이 마른 척 물을 한 잔 들이켰다.
"내 동생 서아도 너 신경 쓰고 있던데." 그녀가 무심하게 던진 말에, 나는 순간 마시던 음료를 잘못 삼켜 기침했다.
"제가 신경 쓸 대상이 이렇게 많아지는 게,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나는 억울한 듯 항변했지만, 윤하람은 재밌다는 듯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워서, 나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애써 표정을 가라앉혔다.
"박유이도 너 얘기하던데, 은근히." 그녀가 덧붙인 한마디에, 나는 이 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서 내가 어떤 소문의 중심에 있는 건지 슬슬 두려워졌다.
"저기, 이거 무슨 국정원 브리핑 시간이에요?" 나는 반쯤 진심으로 물었고, 윤하람은 그 말이 재밌다는 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웃었다.
"넌 몰라도 돼, 알면 더 골치 아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빛만은 진지해서, 나는 순간 웃음기를 지웠다.
"어쩌라는 거예요." 나는 결국 항복하듯 물었고, 윤하람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의 변화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나는 등받이에서 몸을 살짝 세웠다.
"어쩌긴, 즐겨야지. 근데 하나만 명심해." 그녀의 눈빛이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뭘요." 나는 되물었지만,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스쳤다. 카페 안의 온도가 그대로인데도, 손끝이 먼저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강이로, 걔 그냥 학생회 임원 아니야. 이 학교 이사장 손녀야." 윤하람이 낮게 던진 정보에, 나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까지 마시고 있던 물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고,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서연이 나를 관리 대상으로 지정한 것도, 인사이동 얘기가 나온 것도, 어쩌면 강이로와 그 배경이 얽혀 있는 건지도 몰랐다. 갑자기 여러 조각들이 한꺼번에 맞춰지는 기분이었는데, 그 그림이 완성될수록 속이 더 불편해졌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나는 애써 물었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상관없으면 다행이고." 윤하람은 대답을 흐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옆얼굴에 저녁 불빛이 얇게 내려앉아 있었는데,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과는 다르게 어딘가 그늘이 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조심해, 그 애 웃는 얼굴 뒤에 뭐가 있는지." 윤하람의 마지막 경고가, 그날 밤 내 잠을 오래도록 방해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몇 번이나 강이로가 스치듯 잡았던 팔의 감촉을 되짚었다. 그 손끝이 남긴 온도와, 이사장 손녀라는 말이 남긴 냉기가 뒤섞여서, 도무지 어느 쪽이 진짜 위험한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서연은 알고 있을까, 강이로가 누구인지. 인사이동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 배후에 정말 이 아이가 있는 걸까.
나는 휴대폰을 꺼내 서연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화면을 꺼버렸다.
어쩐지, 이 모든 게 단순한 우연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그날 밤 내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